건물을 떠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예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교회'는 장소의 개념이다. "교회에 간다"거나 "교회에서 모인다"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내가 교회로서 살아간다"는 고백은 낯설다. 주일 오전 11시, 화려한 조명과 잘 짜인 프로그램이 있는 예배당은 신앙의 정점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곳은 신앙의 출발선에 불과하다. 건물을 떠나 각자의 일터와 가정으로 흩어지는 그 순간, 비로소 진짜 교회의 사명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Ray Oldenburg)는 집(제1의 공간)과 일터(제2의 공간)를 넘어 사람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장소를 '제3의 공간(The Third Space)'이라 명명했다. 건강한 사회에는 카페나 공원 같은 제3의 공간이 필수적이다. 불행히도 현대의 교회는 세상 속의 제3의 공간이 되기보다, 신자들끼리만 안온함을 누리는 '배타적 아지트'가 되어버렸다. 세상과 소통하기보다 담장을 높이고 그들만의 언어로 성벽을 쌓는 순간,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박물관이 된다.
거대한 교회 건물 안에서 느끼는 경건함은 때로 '장소에 의한 착각'일 수 있다. 웅장한 음악과 집단적인 분위기가 주는 고양감은 내 신앙의 실력이라기보다 환경이 주는 자극에 가깝다. 진짜 영성은 주일의 뜨거운 통성기도가 아니라, 월요일 아침 무례한 상사를 마주할 때, 혹은 금요일 오후 정직과 이익 사이에서 갈등할 때 드러난다. 성전(Temple)이라는 특수 공간을 벗어나 지극히 세속적인 공간에서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평신도가 감당해야 할 가장 난도 높은 사역이다.
우리는 '모이는 구조'에 과도하게 매몰되어 있다. 모든 자원과 에너지를 주일 행사와 건물 유지에 쏟아붓는 구조에서는 평신도가 '교회 운영의 부속품'이나 '목회자의 조력자'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교회(Ekklesia)는 건물이 아니라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의 본질이 '세상으로부터의 부름'뿐만 아니라 '세상으로의 보냄'에 있다고 강조했다. 주일에 모이는 이유는 월요일에 흩어지기 위함이다.
따라서 교회론은 평신도를 '사역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사제'로 재정의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목회자가 교회라는 성역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면, 평신도는 세상이라는 거친 야생을 개간하는 개척자다. 주일 예배가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는 시간이라면, 진짜 경주는 고속도로 위에서 펼쳐진다. 주유소에만 머물러 있는 차는 아무리 기름이 가득 차 있어도 차로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우리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이는가"가 아니라, "우리 교회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얼마나 교회답게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교회의 성공은 건물의 크기가 아니라, 그 건물을 빠져나간 신자들이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불의에 저항하며, 정직한 노동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흩어짐의 밀도'로 측정되어야 한다.
신앙은 교회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넘어, 상식이 통하지 않는 비정한 현실 속으로 '거룩한 침투'를 감행하는 일이다.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 당신은 더 이상 관객이 아니다. 당신이 서 있는 그곳, 당신이 만나는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다. 건물이 사라져도 당신이 여전히 교회인 이유, 그것은 당신의 일상 자체가 하나님 거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