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비극에 '의미'가 있어야 하는가
비극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종교는 서둘러 그 비극 위에 '의미'라는 포장지를 씌운다. 거대한 사회적 참사부터 개인의 소중한 상실까지, 기독교인들이 전매특허처럼 꺼내 드는 단어는 '하나님의 계획' 혹은 '섭리'다. 이 단어는 고통 속에 던져진 이들에게 가짜 안도감을 주려 하지만, 실상은 질문을 봉쇄하고 슬픔을 거세하는 영적 폭력에 가깝다.
나를 키워준 것은 할머니였다. 8살 때 집을 나간 엄마의 빈자리를 할머니는 기도로 채우셨다. 평생 새벽 예배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고, 굽은 허리로 자식을 위해, 그리고 손주인 나를 위해 매일 무릎을 꿇으셨던 신실한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의 마지막은 평생의 경건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참혹한 교통사고였다. 사고 후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가족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사투를 벌이다 돌아가셨다.
이 비극 앞에서도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설령 어떤 뜻이 있다 한들, 평생을 하나님 앞에 엎드린 노인에게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만 했을까? 우리는 할머니가 죽지 않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상식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우리가 원한 것은, 평생을 신뢰해 온 하나님 앞에서 맞이하는 최소한의 존엄이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기획하는 연출가라면, 할머니의 마지막 무대는 너무도 무심하고 잔인했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Hans Jonas)는 비극 앞에서 신을 변호하려 애쓰지 말라고 경고한다. 만약 모든 비극이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이라면, 그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가 아니라 전능한 독재자일 뿐이다. 오히려 상식적인 신앙은 "어떤 비극은 그저 일어난 사고일 뿐"임을 인정하는 정직함에서 시작된다. 중력은 성자와 죄인을 가리지 않고, 사고는 기도하는 노인과 방탕한 자를 차별하지 않는다. 할머니의 사고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이 불완전한 세상이 가진 무심한 물리법칙과 우연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심리학적으로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는 강박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질서를 회피하려는 인간의 방어기제다. 하지만 억지로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도리어 슬퍼할 권리를 빼앗는다. 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계획'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할머니의 부재를 통곡하는 것이었다.
반전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비극을 기획하는 분이 아니라, 비극의 한복판에서 우리와 함께 비극을 목도하며 '어쩔 줄 몰라하시는' 분이다. 할머니가 가족도 몰라본 채 중환자실에 누워 계실 때,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계획의 완성을 즐기신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곁에서 우리와 함께 울고 계셨을 것이다. 신앙이란 비극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게임이 아니라, "의미 없는 비루한 죽음 앞에서도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기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랑의 투쟁이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변호하기 위해 고통을 수단화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 할머니의 기도가 사고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 기도가 남긴 사랑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편리한 신학을 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고통받는 이웃의 손을 잡을 '진짜 상식'을 얻게 된다. 비극은 뜻을 묻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곁을 내어주는 자리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