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지향한다면서 꽉 막힌 사람들
기독교인들이 관계의 갈등 앞에서 가장 즐겨 쓰는 해결책이 있다. “사람과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니,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라”는 조언이다. 수직적인 관계가 바로 서면 수평적인 관계는 자연스레 해결된다는 논리는 언뜻 신령해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당사자에게 해야 할 사과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가장 세련된 도피처가 되곤 한다.
이 논리에 중독된 이들은 갈등이 생기면 사람을 찾아가는 대신 골방으로 숨어든다. 깨진 관계를 수습하기 위해 용기를 내어 미안하다고 말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대면하는 대신, 예배와 기도에 더욱 집착한다. 하나님께 눈물로 회개하고 나면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오고, 그 평안을 곧 ‘관계의 회복’이라 착각한다. 정작 나에게 상처 입은 상대방은 여전히 고통 속에 있는데, 나는 하나님에게 용서받았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상식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지독한 선후관계의 왜곡이다. 성경조차 예물을 드리려다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화해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보다 사람과 화해하는 행위가 우선이라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이 명확한 우선순위를 뒤집는다. 사람에게 해야 할 도리는 생략한 채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구하는 것은, 피해자를 배제한 채 가해자끼리 합의하는 기만적인 종교 놀이에 불과하다.
비극은 그다음 단계에서 완성된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고 확신하는데 상대방의 태도가 여전히 차갑다면, 이제 화살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나는 영적으로 해결되었는데, 아직도 마음을 풀지 못하는 저 사람이 문제다”라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 혹은 ‘용서할 줄 모르는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사과받아야 할 피해자를 도리어 정죄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즘의 정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확신이 타인을 향한 또 다른 폭력의 근거가 되는 셈이다.
반전은 관계의 본질에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과의 관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다가갈 힘을 얻는 통로여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 본 사람은 자신의 오만함과 무례함을 발견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상대방에게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뜨거운 눈물이나 종교적 고양감이 아니라, 내가 상처 준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내미는 구체적인 손길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라는 말 뒤에 숨지 말아야 한다. 사람에게 진 빚을 하나님에게 갚으려 드는 무책임한 경건을 버려야 한다. 신앙은 사람을 건너뛰는 지름길이 아니라, 가장 어렵고 불편한 화해의 자리로 우리를 밀어 넣는 거룩한 등 떠밀기다. 당신이 오늘 드리는 기도가 누군가에게 해야 할 사과를 대신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마취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