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들 뒤에 숨은 야수

당신은 인격자인가, 아니면 무장한 자아인가

by 강훈

평소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는 이가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량을 향해 육두문자를 내뱉는 순간, 우리는 인간성이라는 가면의 얇은 두께를 실감한다. 왜 유독 운전석이라는 좁은 공간은 사람을 이토록 호전적으로 만드는가. 이는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이 설계한 ‘익명성’과 ‘공간의 착각’이 빚어낸 실존적 비극이다.


비가시성이 초래한 윤리의 증발

심리학에서는 이를 '탈개인화(Deindividuation)'라 부르지만, 인문학적으로 보면 이는 '타인의 얼굴'이 사라진 풍경이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인간은 그를 해칠 수 없는 도덕적 명령 앞에 서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도로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맞추지 않는다. 짙은 틴팅 유리 너머로 타인의 구체적인 고통과 사정은 증발하고, 내 앞길을 가로막는 무생물적인 '금속 덩어리'만이 남는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책임도 사라지는, 일종의 윤리적 무중력 상태가 도로 위를 지배하는 것이다.


영토권의 환상과 ‘시간 강도’에 대한 분노

자동차는 현대인에게 제2의 집이자 확장된 자아다. 운전석에 앉는 순간, 차량 내부의 사적 공간은 도로라는 공적 공간으로 투사된다. 이때 내 차 앞으로 끼어드는 행위는 단순히 진로 방해가 아니라, 나의 ‘거실’ 혹은 ‘자존감의 영토’를 침범한 무례한 공격으로 인식된다. 여기에 ‘1분이라도 빨리’ 가야 한다는 가속 사회의 효율성 강박이 더해지면, 도로는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한다. 신호등의 빨간불이나 앞차의 서툰 주행은 내 삶의 소중한 시간을 뺏어가는 강도처럼 느껴지고, 핸들을 잡은 손에는 주권을 침해당했다는 비뚤어진 분노가 서린다.


비루하고도 숭고한 상상력

이 기괴한 야만성을 잠재우는 힘은 거창한 도덕률보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이고 비루한 상상력에서 나온다. 무례하게 끼어드는 차량을 향해 날을 세우기 전, 저 차 안에 앉은 이가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생리적인 절박함—어쩌면 끔찍한 복통과 싸우며 사투를 벌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정말 똥이 급한가 보다"라는 실소 섞인 연민은, 상대를 제거해야 할 금속 물체에서 '나와 같은 약점을 가진 가련한 인간'으로 되돌려놓는다. 타인의 무례를 인격의 결함이 아닌 '절박한 육체의 사정'으로 치환하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노의 시위는 비로소 느슨해진다.


다시, ‘사람’을 운전하는 주권을 찾아서

결국 운전은 기계를 다루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과의 거리를 조절하는 인문학적 행위다. 도로 위에서 잃어버린 인격을 회복하는 길은 철판 속에 가려진 타인의 얼굴을 기어이 다시 찾아내는 데 있다. 내가 멈춰 서는 이유는 상대가 보행자여서가 아니라, 나 또한 언젠가 그 길을 걸을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주권적 공감이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는 태도는 상대를 향한 배려인 동시에, 그 어떤 무례함 앞에서도 나의 평온을 내주지 않겠다는 고도의 주권적 지혜이기도 하다.


맺으며

핸들을 잡았을 때 솟구치는 분노를 느낀다면, 그것은 타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당신의 영혼이 여유라는 주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차창 밖의 타인을 다시 ‘사람’으로 바라보는 상상력, 그리고 그 어떤 끼어들기 앞에서나 정체된 도로 위에서도 나의 품격을 잃지 않는 여유. 그것이 바로 도로 위에서 우리가 지켜내야 할 마지막 인간의 위엄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앞차와의 거리가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내 시선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내 마음의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