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를 사고 싶다, 하지만

가난의 비루함과 위엄에 대하여

by 강훈

가난은 결코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매 순간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이며, 남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안락으로부터 추방되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통증이다. 가난을 ‘우아함’이나 ‘청빈’ 같은 단어로 미화하는 것은 현실의 고난을 외면하는 비겁한 위로일 뿐이다. 가난의 진짜 얼굴은 겨울날의 한기와 자녀의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무력감, 그리고 그 결핍이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는 비루함에 있다.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나도 에르메스를 사고 싶고, 화려한 삶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그 욕망이 향하는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욕망이 내 영혼의 주권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불편함을 미화하지 않을 권리

가난한 삶은 불편하고 힘들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먹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하고, 머물고 싶은 공간에서 쫓겨나며, 시간조차 내 의지대로 쓰지 못하는 결핍의 연속이다. 이러한 가난의 ‘사실성(Facticity)’을 직시하는 것이 주권적 사유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가난을 애써 ‘정신적 풍요로움’이나 ‘소박하고 검소한 삶’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 가난에서 오는 불편함을 가감 없이 인정하는 솔직함이야말로, 세상을 돈의 논리로만 보게 만드는 시스템에 저항하는 가장 인간적인 태도다. 가난의 무게를 정직하게 느끼되, 그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실패자’로 정의하지 않는 것. 그것이 결핍의 현장에서 개인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방어선이다.


명품 가방 뒤에 숨은 빈곤한 인식

가난이 가장 비참해지는 순간은, 자본의 가치 기준에 내 정체성을 완전히 포섭당할 때다. 형편에 맞지 않는 명품에 집착하거나 부자들의 외양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행위는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인식의 종속'이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고 자본이 발행한 '상징물'을 몸에 걸쳐야만 안도하는 태도는, 영혼이 이미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었음을 뜻한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를 ‘아비투스(Habitus)’의 문제로 보았다. 돈이 없다고 해서 부자들의 욕망까지 내 것으로 받아들여 모방하는 것은, 삶을 바라보는 수준이 자본의 평가 시스템 안에 갇혀 있음을 증명하는 꼴이다. 비싼 가방이나 자동차가 나를 대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역설적으로 ‘그것들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처절한 고백과 다름없다. 진짜 가난한 것은 빈곤한 통장잔고가 아니라, 자본의 가격표 없이는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는 그 빈곤한 인식이다.


자본의 평가 기준을 비웃는 배짱

진정한 위엄은 가난 속에서도 풍요로운 척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매긴 나의 가격표를 거부하는 배짱에서 나온다. 세상이 나를 연봉과 자산의 규모로 등급 매기려 할 때, 그 평가 기준 자체를 조롱할 수 있는 힘이다.

주권적인 인간은 물질적 결핍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정신적 가치만큼은 자본의 노예로 내어주지 않는다. 남들이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며 열등감을 가릴 때, 나는 나만의 정직한 사유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고유한 일상의 감각을 지켜낸다. 이것은 가난해도 괜찮다는 기만이 아니라, 나의 존엄성은 자본이 결코 건드릴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임을 선포하는 실존적 투쟁이다. 가난은 당신의 형편일 뿐, 당신의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의 격(格)

지금 당신이 느끼는 위축감과 열등감이 정말 당신의 내면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 사회가 당신에게 강요한 ‘주입된 감정’인지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물건을 소유하지 못해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자본이 설계한 그물에 걸려든 셈이다.

가난의 고통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 불편함을 온몸으로 견디면서도, 그 가난에 나의 ‘이름’을 내주지 마라. 명품으로 가난을 가리려 애쓰는 대신, 그 비용으로 나의 시선을 넓히고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다지는 것. 그것이 자본이 설계한 계급의 사다리를 비웃으며 존엄한 개인으로 남는 길이다. 당신의 가치는 당신이 가진 물건의 총합이 아니라, 그 어떤 결핍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격(格)에서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