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좋은 거룩함

혐오를 동력으로 삼는 신앙의 기만

by 강훈

한국 교회가 가장 뜨겁게, 그리고 단합된 목소리로 격분하는 풍경은 기이하다. 평소 인자하던 신앙인들의 눈빛은 ‘동성애’라는 단어 하나에 서슬 퍼런 심판자의 그것으로 돌변한다. 그들은 성경이 금한 ‘죄’이기에 목숨 걸고 막아야 한다고 외치지만, 상식의 눈으로 보면 질문이 남는다. 성경이 금한 수많은 죄 중에서, 왜 유독 이 문제에만 그토록 처절한 에너지를 쏟아붓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은 동성 간의 행위만큼이나 이혼과 간음, 탐욕과 거짓말을 엄중하게 다룬다. 특히 ‘이혼’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직접 단호한 가르침을 주셨음에도, 우리는 이혼 금지를 위해 거리로 나서거나 차별금지법만큼의 격렬함을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아픔’과 ‘회복’이라는 단어로 그들을 보듬는다. 왜 유독 이 영역에서만 따뜻한 은혜의 논리는 멈추고 차가운 법과 심판의 논리만 득세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파헤치면 지극히 인간적인, 그래서 서글픈 심리가 숨어 있다. 바로 ‘나는 그 죄를 저지를 리 없다’는 영적 안전감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도덕적 면죄부 효과(Moral Self-Licensing)’는 여기서 고약하게 작동한다. 이혼이나 탐욕, 거짓말은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너그러운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하지만 대다수의 신앙인은 동성애만큼은 자신과 영원히 상관없는 일이라 확신한다. 내가 저지를 가능성이 전무한 죄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만큼 안전하고 짜릿한 도덕적 성취감은 없다.


이것은 일종의 ‘가성비 좋은 거룩함’이다. 내 안의 추악한 욕심과 싸우거나 일상의 무례함을 고치는 일은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와 다른 소수자를 정죄하는 일은 아무런 자기희생 없이도 나를 의로운 전사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사회학적으로 이 광기 어린 단합은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간파한 ‘희생양 메커니즘’의 전형이다. 내부의 갈등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외부의 소수자를 적대시하며 거룩한 통합을 꾀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학계의 연구 결과는 이러한 정죄의 논리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 생물학적으로 성적 지향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내재적 형질임이 밝혀지고 있으며, 세계보건기구(WHO)가 이를 질병 목록에서 삭제한 지 이미 오래다. 정신의학계는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그들을 향한 사회적 차별이 유발하는 ‘소수자 스트레스’가 진짜 문제임을 경고한다. 즉, 교회가 '죄'라고 낙인찍는 행위는 실제로는 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부정하는 일이며, 이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명백한 실존적 야만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역설과 마주한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성가 중의 한 사람, 그가 쓴 책으로 아침을 열고 눈물을 흘리며 묵상하는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의 진실이다. 21세기 기독교 영성의 정수라 불리는 그의 통찰들은, 사실 그가 평생을 고뇌하며 품고 살았던 동성애적 지향성이라는 상처에서 길어 올려진 것들이었다. 사후에 밝혀진 그의 일기와 고백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그 정체성을 가진 이가 당신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생명수를 길어 올렸다면, 과연 그가 가진 정체성은 지워져야 할 악인가, 아니면 신비로운 은총의 통로인가.


사도 바울의 일갈은 이 지점에서 아주 냉정한 거울이 된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서 2:1)”는 경고는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 직설이다. 성경의 권위를 빌려 타인을 난도질하는 이들이 정작 동일한 성경이 금한 탐욕과 시기에는 관대한 모순을 바울은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타인을 향해 든 돌의 무게가 결국 당신 자신의 죄와 같은 무게임을 자각하라는 이 준엄한 권고는 신앙의 상식을 회복하라는 마지막 요청이다.


이제 우리는 단어 뒤에 숨은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 한다. 성경 구절을 흉기로 휘두르기 전에, 우리 안의 이기심과 무례함이라는 죄는 어찌할 것인지 먼저 물어야 한다. 진정한 거룩함은 내가 저지르지 않는 죄를 비난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내가 범하는 작은 허물에도 통곡하는 겸손함에서 시작된다. 상식적인 신앙인은 타인의 정체성을 심판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서 있을 수 없는, 각기 다른 종류의 결핍을 가진 존재임을 인정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