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두께

‘준비’라는 이름의 유예된 생(生)

by 강훈

우리는 평생을 연습실에서만 보낸 연주자와 같다. 학창 시절은 좋은 대학을 위해, 직장 생활은 안락한 은퇴를 위해, 그리고 은퇴 후에는 오지 않은 노후의 불안을 위해 끊임없이 현재를 희생한다. 지금 인류는 유례없이 긴 수명을 선물 받았으나 역설적으로 '지금 여기'에 머무는 능력은 퇴화했다. 늘어난 시간은 얇고 길게 늘어진 고무줄처럼 팽팽한 긴장과 공허만 더할 뿐이다. 인생의 오후를 지나며 우리가 회복해야 할 주권은 시간의 '양'을 늘리는 경주가 아니라, 시간의 '두께'를 회복하는 일이다.


‘침묵’하는 세계와 ‘공명’하는 영혼

현대 사회학자 하르트무트 로자(Hartmut Rosa)는 우리가 왜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더 쫓기는지 해부하며 ‘공명(Resonance)’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를 제시했다. 그는 우리가 미래의 안정을 위해 현재를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들수록 세계는 우리에게 '침묵'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준비하는 삶 속에서 세계는 그저 우리가 정복해야 할 대상일 뿐, 우리와 함께 울리는 악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의미의 '살아있음'은 얼마나 많은 노후 자금을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순간 세계와 뜨겁게 공명했느냐로 측정된다. 예기치 못한 노을의 빛깔에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누군가의 진심 어린 눈빛에 영혼이 떨리는 순간들. 그 순간의 '진동'들이 모여 시간의 두께를 만든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잡는 '준비의 삶'은 안전할지는 모르나, 세계와의 공명이 차단된 무미건조하고 진공 상태와 같은 방 안에서의 연주와 다름없다.


‘준비’라는 마취제에서 깨어나기

우리는 '준비'라는 단어에 속아 생의 가장 눈부신 순간들을 너무나 쉽게 저당 잡힌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은퇴하고 나면"이라는 말은 사실 현재의 비겁함을 숨기기 위한 세련된 변명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음 단계'를 준비하라며 불안을 주입하지만, 인문학적 주권은 그 불안의 굴레를 끊어내고 지금 이 순간의 밀도를 선택하는 용기에서 나온다.

시간의 두께는 효율성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두꺼워진다.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영양가 없는 대화에 몰입하고, 목적지 없이 걷는 산책길에서 길을 잃으며, 오로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소모하는 '숭고한 낭비'가 필요하다. 시스템은 이것을 시간 낭비라 부르지만, 우리의 영혼은 이것을 '존엄한 현존'이라 부른다.


맺으며: 매 순간이 생의 전부인 것처럼

100세 시대의 위엄은 남들보다 더 긴 생존 기간을 확보하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시스템이 설계한 '준비의 굴레'를 거부하고, 단 한 순간이라도 내 영혼이 세계와 뜨겁게 반응하는 두께를 경험하는 데 있다.

준비하는 삶은 언제나 '아직'이지만, 현존하는 삶은 매 순간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제 무대의 막이 오르기만을 기다리며 분장실에서 서성이는 일을 멈추자.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무대이며, 당신이 내뱉는 숨 한 자락, 마주하는 눈길 하나가 당신 생의 가장 중요한 본문이다. 시간의 길이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공명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긴 생의 끝에서 마주할 가장 후회 없는 주권적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