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라는 이름의 게으른 행정

스마트폰 프리 운동이 놓친 주권의 자리

by 강훈

최근 안민석 전 의원이 주도하는 ‘청소년 스마트폰 프리 운동’은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초·중학교 내 스마트폰 사용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16세 미만 청소년의 SNS 이용까지 법으로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스마트폰을 ‘마약보다 강한 중독물’로 규정하고 이를 치워버리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는 논리다. 2026년이라는 초연결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국가와 정치권이 내놓은 해법은 여전히 20세기 교실의 ‘압수’와 ‘통제’라는 전근대적 틀에 갇혀 있다.


금지라는 마취제, 성찰이라는 근육의 퇴화

안 전 의원이 내세우는 ‘Phone Off’는 언뜻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다정한 손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아이들이 기술이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스스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울 기회를 박탈한다. 진정한 교육은 도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도구를 부리는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이지만 나는 두 딸들에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했다. 하지만 둘 모두 폰에 매달려 살지 않는다. 게임도 하고 유튜브도 보지만,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선을 스스로 인지한다. 이는 국가의 금지가 만든 결과가 아니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끊임없이 ‘우선순위’와 ‘자기 결정권’을 대화로 조율해 온 시간의 결과물이다. 물론 지속적으로 이야기하였고 시행착오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폰을 뺏는 제도는 이런 내면의 성찰 과정을 생략한 채, 강제라는 마취제로 아이들의 욕망을 잠시 잠재울 뿐이다. 금지로 얻은 정숙함은 교육이 아니라 사육에 가깝다.


구조적 결핍을 가리는 정치적 수사

우리는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아이들은 스마트폰 속으로 숨어드는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드는 뒤틀린 사회 구조다. 무한 경쟁의 노동 시장에서 부모들은 아이의 눈을 맞출 시간조차 뺏긴 채 일터로 내몰린다.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것은 다름 아닌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보육교사’다.

국가가 진정으로 아이들을 걱정한다면 학교 담장을 높여 폰을 뺏을 궁리를 할 것이 아니라, 부모가 아이와 함께 숨 쉬고 대화할 수 있는 ‘구조적 여유’를 어떻게 보장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현상을 아이들의 ‘중독’과 부모의 ‘방임’ 탓으로 돌리며 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국가의 명백한 게으름이자 책임 회피다. 부모의 역할이 부재한 자리에 법의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는 것은 결코 근본적인 치유가 될 수 없다.


AI 시대, 거세된 디지털 리터러시

첨단 AI와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 지금, 디지털 기기는 신체의 확장과 같다. 이를 법으로 금지하는 것은 마치 종이가 보급되던 시절 사유를 방해한다며 책을 압수했던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금지의 법’이 아니라 ‘문해력의 교육’이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진실을 가려내고, 알고리즘의 유혹을 주체적으로 거부하며, 디지털 도구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AI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생존권이다. 학교를 ‘디지털 무균실’로 만들려 할 때, 아이들은 실제 세상이라는 거친 광야에서 살아남을 면역력을 잃게 된다. 주권은 통제된 환경이 아니라, 유혹의 현장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맺으며: 빼앗긴 폰, 회복해야 할 주권

안민석 전 의원의 제안처럼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놓는’ 환경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법에 의한 강제나 획일적인 규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을 단지 통제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전근대적인 시선을 거두어야 한다. 물론 투표권을 가진 부모들은 좋아할 이슈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진정한 해법은 학교의 담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기능을 회복시키고 아이들에게 스스로 시간을 경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 폰을 뺏는 손을 거두고, 아이들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아이들의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싸워야 할 진짜 전쟁터다. 주권은 국가가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핸들을 잡고 세상을 항해할 때 비로소 피어나는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