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걷는 힘
오늘날의 전도는 무례하다. "불편해해도 누군가 한 명이라도 구원받으면 된다"는 논리는 이웃의 인격과 주권을 가볍게 짓밟는 폭력이다. 그들에게 이웃은 나와 같은 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실적을 채우기 위한 포교 대상이자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존재’일 뿐이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는 그 설익은 확신은, 어느덧 이웃을 자기 발아래 두려는 추한 오만이 되어 우리를 괴물로 만든다.
- '불쌍히 여김'이라는 추한 오만
많은 기독교인이 전도 대상자를 향해 "예수 몰라 방황하는 가련한 영혼"이라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을 제멋대로 '불쌍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독하게 추한 오만이다. 상대가 일구어온 삶의 궤적을 '틀린 것' 혹은 '모자란 것'으로 단정하고, 자신은 뭔가를 더 깨달아 대단히 훌륭해진 사람처럼 구는 태도는 복음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태도는 정작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다. 반대로 상대방은 그런 태도를 금세 알아본다.
진정한 신앙의 유익은 누군가보다 높아지는 사다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나란히 설 수 있는 ‘낮은 마음의 평지’를 회복하는 데 있다. 상대를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보는 순간, 진정한 대화는 사라지고 일방적인 강요만 남는다. 그것은 전도가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자부심을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는 행위일 뿐이다.
- '문화적 침공'과 무례한 확신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는 자기 가치관이 정답이라 믿고 그것을 남에게 강제하는 것을 ‘문화적 침공(Cultural Invasion)’이라 불렀다. 침공자들은 상대방을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존재’로 취급하며,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주체성을 철저히 무시한다.
우리 주변의 전도는 이 침공의 모습과 닮아 있다. 전도자는 자신을 모든 것을 가진 ‘부자’로, 이웃을 아무것도 없는 ‘거지’로 상정한다. 그러나 진정한 전도는 누군가의 세계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과 그가 간직한 고유한 삶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가진 답을 쏟아붓기 전에, 그 사람이 어떤 아픔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지 먼저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영적 고자세를 버리는 진심 어린 겸손
자신은 진짜를 알기에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태도는 가장 경계해야 할 신앙의 독이다. 겉으로는 영혼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내 입맛대로 바꾸려는 통제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자세는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마저 위선의 늪에 빠뜨린다.
진짜 전도는 "나는 안다"는 권위를 내려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듯, 우리 역시 '진리의 소유자'라는 착각을 버리고 이웃의 곁에 낮게 앉아야 한다. 나의 약함과 실패를 정직하게 인정하며, "나 역시 당신처럼 매일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평범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진심 어린 마음’이 필요하다. 자세를 낮추는 겸손만이 굳게 닫힌 이웃의 마음 문을 두드릴 수 있다.
- 나란히 걷는 이의 정직한 안부
결국 전도의 유익은 누군가를 교화시키는 성취감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나의 오만을 발견하고 깎아내는 과정에 있다. 전도는 상대를 굴복시키는 승전보가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웃에게 건네는 따뜻하고 정직한 안부여야 한다.
당신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당신의 확신이 누군가에게는 숨 막히는 폭력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무조건 믿으라"는 무례한 고자세를 거두고, 한 사람의 인생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법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 혐오와 각자도생이 만연한 세상에서 끝내 이웃을 '나와 동등한 주인'으로 대우하는 것. 그 정직한 연대야말로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