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땅을 되찾는 독립 선언

용서, 나를 묶고 있던 남의 사슬을 끊는 일

by 강훈

용서는 결코 마음 넓은 사람이 못난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증오라는 감옥에 갇혀 가해자에게 내 일상을 저당 잡힌 상태를 끝내려는,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내리는 단단한 선택이다. 신앙이 주는 진짜 유익은 상대방을 너그럽게 봐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내 삶에 더 이상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내 마음의 영토를 완전히 되찾아오는 데 있다.


- 상대를 깔보는 고약한 마음을 걷어내기

용서를 '먼저 깨달은 자의 너그러움'으로 포장하는 것은 위험하다. 내 상처는 여전히 피를 흘리는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 위에 급하게 연고를 바르고 "나는 다 잊었다"고 말하는 것은 속은 곪았으면서 겉만 멀쩡한 척하는 가짜 평화일 뿐이다. 이런 식의 용서는 자기 기만이며, 결국에는 "나는 너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얄팍한 우월감으로 변질되어 상대를 더 무시하게 만든다. 진짜 용서의 시작은 내 아픔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진심 어린 겸손에서 나온다. 내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낱낱이 고백해야 한다. 용서는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처 입은 내 영혼의 얼굴을 먼저 어루만지는 일이다.


-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파격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진정한 용서란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때만 시작된다고 말했다. 상대가 사과했으니까, 혹은 충분히 보상했으니까 해주는 용서는 '거래'나 '장사'일 뿐이지 본질적인 용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신앙이 주는 파격적인 유익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세상은 받은 대로 돌려주는 인과응보의 논리로 돌아가지만, 신앙은 그 사슬을 끊어버리는 힘을 준다. 상대의 태도와 상관없이, 그가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 비논리적인 선택만이 우리를 복수의 굴레에서 건져낸다.


- 피와 땀이 섞인 노동으로서의 용서

용서는 한순간의 깨달음으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다. 매일매일 내 안에서 솟아오르는 미움을 깎아내고 다듬는 고된 노동이다. 나를 아프게 했던 기억이 불쑥 찾아와 내 하루를 망치려 할 때마다, "너는 더 이상 내 주인이 아니다"라고 다시금 선언하는 치열한 싸움이다.

이 노동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성숙해진다. 남의 잘못에 내 평화가 휘둘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의 근육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묶여 있던 나를 풀어주는 행위다. 내 삶의 운전대를 다시 내가 쥐는 것, 그 주체적인 삶의 회복이야말로 신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 다시 시작할 권리, 진짜 자유

결국 용서의 본질은 과거에 붙들려 있던 에너지를 미래로 돌리는 데 있다. 미움은 우리를 과거의 그 시간에 가두지만, 용서는 우리를 오늘이라는 평지로 끌어내어 다시 걷게 한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당신의 소중한 마음의 공간을 내어주고 있는가. 당신의 분노는 혹시 당신의 권리를 상대에게 상납하는 통로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숙제를 집어 던지고, 당신의 땅을 되찾기 위한 독립 선언을 시작해 보라. 이웃과 다시 진실하게 마주하는 일은, 당신이 먼저 미움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주인이 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