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길 위에서 나침반을 드는 법

정답이 사라진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기

by 강훈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꿈을 가져라"거나 "노력하면 된다"는 조언은 무책임한 폭력에 가깝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대 사회는 더 이상 고체처럼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흐르고, 변하며, 순식간에 사라진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이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신앙을 '목적지까지 빠르게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으로 오해했던 종교적 관성은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게 되었다. 진짜 신앙의 유익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속도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도 '사람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 나만의 나침반을 갖는 데 있다.


‘액체 현대’를 견디는 단단한 중심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라고 정의했다. 과거에는 직장, 가정, 공동체라는 고정된 틀이 우리를 지탱해 주었지만, 이제 그 모든 틀은 녹아내렸다. 모든 것이 유동적인 이 세상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는 강박과 언제든 버려질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신앙은 이 유동적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녹지 않는 지점'을 선언한다. 세상이 "너의 가치는 너의 스펙과 연봉에 달려 있다"고 얘기할 때, 신앙은 "너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선 아래 있다"고 말해준다. 이 선언은 막연한 위로가 아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는 바다에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무거운 평형수'와 같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단단한 중심이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시대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설 수 있다.


‘모를 권리’와 정직한 기다림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청년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확신에 대한 강박'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고 성과를 내라고 다그친다. 기독교 역시 "기도하면 앞날이 환히 보인다"는 식의 가짜 확신을 팔아왔다. 하지만 성경의 수많은 인물은 정작 자기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채로 길을 떠났다.

진짜 신앙의 유익은 "모르겠다"고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다 알아야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는 신앙이 아니라 불안의 노예 상태다. 신앙인은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하기에 오늘 내게 주어진 작은 진실에만 집중한다. 이 '정직한 모름'은 우리를 조급함에서 건져내어, 오늘 하루를 온전히 인간답게 살아낼 에너지를 준다.


성공이 아닌 ‘방향’의 주권

우리는 신앙을 통해 인생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승리자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불확실성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장애물 없는 길이 아니라, 어떤 장애물을 만나도 꺾이지 않는 ‘방향성’이다. 소망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상황이 어떠하든 내가 인간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다.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틀을 버려야 한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그 과정에서 이웃을 연민하고 정의를 선택했다면 그것은 이미 아무나 할 수 없는 특별한 승리다. 신앙은 우리에게 목적지에 도착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대신 "너는 지금 어느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가?"를 묻는다. 목적지가 사라진 시대에 이 방향에 대한 감각이야말로 우리가 청년들에게 전해줘야 할 가장 귀한 신앙의 유산이다.


혼돈 속에 짓는 작은 집

결국 불확실성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매일 무너지는 모래성 위에 다시 벽돌을 쌓는 일과 같다. 세상이 아무리 정신없이 흘러가도, 나는 오늘 내 곁의 사람과 온기를 나누고 정직한 땀을 흘리겠다는 다짐이다.

너의 삶이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 몰라 불안한가. 남들은 다 앞서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두려운가. 괜찮다. 신앙은 너에게 지도를 주지 않지만, 별을 보여줄 것이다. 화려한 미래라는 신기루를 쫓느라 오늘 너의 아름다움을 낭비하지 마라. 거대한 파도에 맞서려 하기보다, 네가 서 있는 그 작은 자리에서 인간의 예의를 지켜내는 것. 그 투박한 성실함이 결국 너를 가장 소중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