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을 멈춘 공동체에 내일은 없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좋은 점도 많은데 왜 비판만 하나?", "비판하는 건 성경적이지 않다."
공동체의 모순을 지적할 때마다 날아오는 이 화살들은 얼핏 타당해 보인다. 긍정적인 면을 보고 사랑으로 감싸는 것이 신앙인의 도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 그 말들 다 맞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쉬쉬하고, 모든 문제를 은혜라는 이름으로 덮어왔던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기독교,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폐쇄적인 집단. 이 지독한 현실을 보면서도 비판 자체를 죄악시한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침몰하자는 고집일 뿐이다.
‘은혜’라는 이름의 마취제
우리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은혜라는 단어를 오용한다. 명백한 잘못과 구조적인 야만 앞에서도 "하나님이 선하게 이끄실 것"이라며 입을 닫는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이다. 곪은 상처를 도려내지 않고 붕대만 감아두면 결국 온몸이 썩어 들어간다.
진짜 은혜는 잘못을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뼈아프게 직시하고 돌이킬 기회를 얻는 것이다. 비판의 내용이 틀렸다면 그 내용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하면 된다. 하지만 비판을 하는 태도나 행위 자체를 '영적이지 않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스스로 성찰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정의 없는 사랑은 가식이다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인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그의 저작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개인의 선의만으로는 사회의 악을 막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특히 그는 종교인들이 빠지기 쉬운 '감상적인 사랑'의 위험성을 꼬집었다. 정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사랑은 결국 기득권의 횡포를 묵인하고 피해자의 눈물을 외면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니버에게 진정한 사랑은 ‘정의’라는 옷을 입고 나타나야 한다. 공동체 내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려는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동체가 건강하게 숨 쉴 수 있도록 정의의 토대를 닦는 헌신이다. 비판 없는 사랑은 가짜다. 그것은 단지 갈등이 무섭거나 불편해서 평화를 연기하는 가식에 불과하다.
'내가 얼마나 잘났나'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의 문제
비판하는 자를 향해 "본인은 얼마나 대단해서 그러느냐"고 묻는 것은 전형적인 논점 흐리기다. 비판은 비판하는 사람의 인격적 완벽함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가 사실인지,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도리에 어긋나는지를 따지는 자리다.
비판받을 만한 문제가 있다면 스스로를 돌아보고 변하는 것이 순리다. "예전엔 좋은 일도 많이 했다"는 과거의 영광이 오늘의 잘못을 덮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혼자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물어보자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정직함마저 거부한다면 그 공동체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아픈 질문을 멈추지 않는 용기
결국 비판의 유익은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되돌려놓는 데 있다. 맹목적인 추종과 침묵의 굴레에서 벗어나, 무엇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는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를 눈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지 않으려는 어두운 곳을 더 밝게 보게 하는 빛이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공동체의 쓴소리를 어떻게 듣고 있는가. "은혜롭지 못하다"며 귀를 막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비판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 하지 말고, 그가 지키려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들여다보라. 스스로를 해부하는 아픔을 견디는 공동체만이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진짜 진리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