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속의 전쟁

피스메이커로 산다는 건

by 강훈

- 구경꾼이 된 성도와 사라진 고통

오늘날 전쟁은 실시간 스트리밍되는 고해상도의 영상으로 소비된다. 이란에서 터지는 폭격소리는 우리에게 한갓 국제 정세의 수치나 유가(油價) 변동의 요인으로 인식이 되기도 한다. SNS 피드에는 어느 편이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분석과 종교적 예언들도 보이지만, 그 화려한 분석 어디에도 먼지 덮인 잔해 속에서 아이를 찾는 부모의 오열은 담겨있지 않다. 신앙인이 경계해야 할 가장 큰 지점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다. 타인의 비극을 ‘역사의 필연’이나 ‘심판’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면, 우리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의미가 퇴색하고 만다. 전쟁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거나 찾는 무대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거대한 신성모독의 현장이다.


- 정의라는 이름의 칼날이 겨누는 곳

모든 전쟁은 저마다의 ‘정의’를 앞세워 개시된다. 이란의 명분과 그 대척점에 선 세력들의 명분은 각자의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의 본질은 언제나 ‘타인의 비인간화’를 전제로 한다. 상대를 괴물로 규정해야만 살육이 비로소 ‘정의로운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 역시 이 위험한 논리에 자주 가담해 왔다. 특정 국가나 세력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거나, 전쟁을 거룩한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는 태도는 복음의 핵심인 화평을 거부하는 일이다. 신앙인의 과제는 깃발 아래 모이는 것이 아니라, 그 깃발 때문에 짓밟히는 이들의 존재를 돌아보는 데 있다.


-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사회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는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집단(국가, 민족)의 일원이 되는 순간 집단 이기주의에 함몰되기 쉽다고 경고했다. 전쟁은 바로 이 집단 이기주의의 극단적 발현이다. 니부어의 ‘기독교적 리얼리즘’은 우리에게 순진한 평화주의를 넘어선 통찰을 요구한다. 즉, 악이 실재하는 세상에서 정의를 구하는 길은 힘의 균형만이 아니라, 그 권력 너머의 ‘겸비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그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미가 4:3)이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무기를 없애자는 구호가 아니라, 파괴의 도구를 생명의 도구로 바꾸려는 존재론적 전환을 의미한다.


- 평화의 제작자(Peacemaker)로 산다는 것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느 진영의 승리를 기도하는가, 아니면 생명의 보존을 위해 우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평화를 만드는 자”(마태복음 5:9)는 갈등이 없는 상태를 즐기는 자가 아니라, 적대감이 가득한 현장에서 화해의 자리를 일구어내는 노동자를 뜻한다. 신앙인의 주권적 태도는 증오의 연쇄를 끊어내는 침묵과 연대에 있다. 이란의 무고한 시민들과 그 대립의 현장에 서 있는 청년들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임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전쟁을 부추기는 모든 정치적 선동에 저항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품격 있는 신앙의 자세다. 평화는 강한 자의 여유로운 베풂이 아니라, 아파하는 자들의 손을 잡는 용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