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속의 감격은 정말 성령의 일하심일까

감정의 카타르시스는 어떻게 신앙의 알리바이가 되는가

by 강훈

우리는 예배당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성령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의심 없이 확신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악기 소리가 멈춘 뒤, 그 눈물의 주인공들이 살아가야 할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은 우리를 당혹게 한다. 어쩌면 우리가 집착하는 그 뜨거운 체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총이 아니라, 고단한 자아를 달래기 위해 스스로 제조한 정교한 심리적 위안일지도 모른다.


- 소리 높은 찬양과 소리 없는 일상

설교 시간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던 마음이 찬양의 강력한 비트와 반복되는 가사 앞에서는 무장해제된다. 어두운 조명과 세련된 선율은 우리를 순식간에 감정의 고조로 몰아넣고, 참아왔던 눈물샘을 자극한다. 하지만 기이한 점은 그 눈물의 ‘유효기간’이다. 뜨겁게 울며 부르짖던 그 입술이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타인을 향한 날카로운 비수로 변하거나, 일상의 사소한 이기심 앞에서 무력해진다면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 눈물은 진정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었는가, 아니면 억눌린 자기 연민이 종교라는 무대를 빌려 터져 나온 ‘감정적 배설’이었는가.


- 카타르시스라는 종교적 중독

대규모 집회나 감정적 찬양 사역이 주는 고조된 상태는 일종의 카타르시스적 기능을 수행한다. 지친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와 억압된 감정들이 종교적 수사(Rhetoric)와 결합하여 폭발할 때, 인간은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엔도르핀의 영향으로 강렬한 해방감을 맛본다. 문제는 이 해방감을 ‘영적 체험’으로 착각하기 쉽다는 데 있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내가 마치 정결해진 것 같고,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삶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눈물은 성장을 멈추게 하는 마취제에 불과하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과 타인을 향한 책임감을 생략한 채, 오직 ‘나의 느낌’에만 몰두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영성이다.


- 에밀 뒤르켐의 ‘집단적 흥분’과 마취된 신앙

사회학의 아버지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종교적 의례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에너지를 ‘집단적 흥분(Collective Effervescenc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사람들이 모여 같은 리듬에 맞춰 노래하고 춤추며 일상의 질서에서 벗어날 때, 개인은 자신보다 거대한 힘에 휩싸이는 듯한 일체감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흥분은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여주지만, 동시에 이성적인 판단과 윤리적 책임을 흐릿하게 만드는 부작용을 낳는다. 신앙의 영역에서 집단적 흥분은 종종 ‘성령의 충만’으로 오역된다. 뒤르켐의 통찰을 빌려보자면, 우리가 예배에서 경험하는 전율은 하나님과의 대면이 아니라 집단이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에 취한 상태일 수 있다. 진정한 영성은 그 흥분이 가라앉은 차가운 평일 아침,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웃을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의지의 언어’에서 시작된다.


- 눈물이 수건이 되지 못할 때

눈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눈물은 고결하다. 그러나 그 눈물이 타인의 발을 닦아주는 ‘수건’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장식품일 뿐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는가의 여부는 평소에 얌전하던 사람이 열정적으로 했느냐, 방방 뛰면서 찬양했느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느냐가 아니라, 예배 이후의 삶이 얼마나 더 정중하고 따뜻해졌느냐에 달려 있다. 신앙은 감정의 파도를 타는 기술이 아니라, 그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거친 모래밭을 묵묵히 일구는 노동이다. 당신의 눈물은 오늘 누군가의 상처를 적시는 비가 되었는가, 아니면 그저 당신의 공허를 채우는 소금물이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