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젊은 세대들과 소통할 때엔 입은 무거워야 하고 지갑은 가벼워져야 한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정작 현실의 나는 자꾸만 누군가의 삶에 참견하고 싶은 속 좁은 욕망과 싸운다. 오십의 문턱을 넘으며 가장 경계하게 되는 것은, 내가 살아온 세월을 훈장처럼 휘두르며 타인의 서툰 오늘을 함부로 판단하려는 나의 오만함이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그동안 내가 건넸던 수많은 '조언'은 사실 상대를 향한 배려가 아니라 나의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했던 비겁한 외침이었다.
요즘 나는 말을 내뱉기보다 삼키는 법을 먼저 배운다. 예전에는 상대의 고민을 들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해결책을 쏟아내곤 했다. 그것이 어른의 도리이자 선배의 미덕이라 믿었던 나의 생각은 얼마나 큰 착각의 편견이었나. 내가 겪은 시행착오를 근거로 타인의 방황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몰아세우던 나의 시선은 참으로 정이 없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답을 안겨주는 것은, 그 사람의 고유한 삶의 영토에 허락 없이 발을 들이는 무도한 침범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대개 '걱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간섭한다. 하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타인의 삶을 내 뜻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는 뒤틀린 권력욕이 숨어 있다. 누군가 아픔을 털어놓을 때 서둘러 조언을 던지는 행위는, 사실 상대의 고통을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을 견디기 힘든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얄팍한 마음이기도 하다. 상대방의 깊은 한숨을 온전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서둘러 ‘옳은 말’로 대화를 종결지으려 했던 나의 옹졸함을 이제야 아프게 마주한다.
진정한 어른은 유명한 명언이 담긴 조언이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해결책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스스로의 답을 찾아낼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는 침묵에서 시작된다. 침묵은 결코 무관심이 아니다. 침묵은 타인의 주체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식이다. 내 언어로 상대의 슬픔을 규정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이 내뱉는 고단함의 무게를 함께 견뎌주는 것. 나의 지도를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헤매는 과정을 묵묵히 응원해 주는 것. 이러한 침묵은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 단단하고 따뜻한 동행이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경험이 보편적 진리가 아님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내 손에 든 지도가 타인의 정글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낡은 종이 쪼가리일 수 있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닌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할 수 있다.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함부로 누군가의 영토에 깃발을 꽂지 않는다. 대신 상대가 내어준 마음의 틈새를 억지로 벌리지 않는 절제를 통해 서로를 존중한다.
이제 나는 마침표보다 물음표를, 주장보다 경청을 선택하려 애쓴다. 여전히 입이 간지럽고 하고픈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지만, 내 입을 열어 나를 증명하기보다, 입을 닫아 상대를 존재하게 하는 침묵의 힘을 믿어 보기로 한다.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타인이 자유롭게 숨 쉬고 생각할 수 있도록 내어주는 드넓은 여백이다. 내가 말을 아낄수록 우리 사이의 공간은 더 풍성한 진심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와 마주 앉아 혀끝까지 차오르는 조언을 꾹 눌러 담는다. 그의 서툰 방황을 지켜봐 주는 든든한 배경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존중의 침묵을 지켜낼 때, 우리 사이의 거리는 비로소 안전하고 따뜻한 온기로 채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