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차별금지법’이라는 단어 앞에서 이토록 격렬하게 진동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가 가진 복음의 생명력에 대한 불신을 자백하는 꼴이다. 2026년 현재, 국회에는 진보당 손솔 의원(1월)과 더불어민주당 정춘생 의원(2월)이 각각 발의한 새로운 차별금지법안들이 올라와 있고, 이에 맞서 광장에서는 여전히 ‘거룩한 방파제’라는 표현으로 대규모 반대 예배가 열리고 있다.
- ‘예배’가 아닌 ‘시위’가 된 강단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교회의 주요 집회는 ‘회개’와 ‘송축’ 대신 ‘반대’와 ‘사수’라는 단어로 가득 차있다. 2024년 10월의 100만 연합예배부터 최근 2026년 3월 부산에서의 대규모 집회까지,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기보다 국회의사당과 법전을 향해 있다. 법이 통과되면 설교를 못 하게 되고, 교회가 파괴되며, 동성애가 강요될 것이라는 공포 정치가 강단을 점령해 버렸다. 복음의 주권을 선포해야 할 자리에 법 조항에 대한 해석과 정치적 구호가 들어선 풍경은, 이미 그들이 신앙을 하나의 ‘이익집단적 투쟁’으로 전락시켰음을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 법이 금지하는 것은 ‘차별’이지 ‘신앙’이 아니다
법률적으로 볼 때 교회의 주장은 상당 부분 과장된 공포에 기반하고 있다. 현재 논의되는 법안들의 핵심은 고용, 재화·용역의 공급, 교육, 행정 서비스라는 공적 영역에서의 부당한 차별을 금지하는 것이다. 설교권 침해도 내용에 없다. 예배당 안에서의 설교, 전도, 교리 교육은 이 법이 적용되는 ‘공적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목사가 강단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말한다고 해서 감옥에 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누가 그 말을 처음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무지의 극치다.
심지어 동성애 권장하는 법이라는 표현도 한다. 차별금지법은 특정 성적 지향을 권장하는 법이 아니라, 어떤 지향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쫓겨나거나 혐오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이다. 기독교 위주로 표현하자면 불교 신자인 사장이 직원을 뽑을 때 지원자가 기독교라고 해서 차별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이렇게 까지 구구절절 말하는 자체가 웃프다) 어쩌면 그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설교권의 박탈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혐오할 수 있는 특권’과 ‘정죄의 주도권’이 법적 상식 아래 놓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복음은 법의 보호 아래서만 숨 쉬는가
여기서 우리는 가장 치명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설령 그들의 우려대로 법이 교회의 입을 막으려 한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기독교는 침묵해야 하는 건가? 기독교의 역사는 법이 허락해서 복음을 전한 역사가 아니다. 로마의 칼날 앞에서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앞에서도, 독재 정권의 탄압 아래서도 그리스도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말하며 피를 흘렸다.
진정 영적인 주권을 가진 종교라면 법 조항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비명을 지를 것이 아니라, 어떤 법 체계 아래서도 사랑과 진리를 살아내겠다는 결기를 보여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법의 보호를 구걸하며 타인을 배제하려는 태도는, 스스로를 세상의 권력 아래 종속시키는 가장 영성이 떨어지는 행동이다.
- 성벽을 허물고 광장의 ‘낮은 진리’로
신앙의 주권은 차별할 수 있는 자유를 사수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법이 금지하더라도 낮은 곳으로 내려가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을 환대하는 사랑의 실천에 있다.
교회는 이제 “반대한다”는 시끄러운 소음을 멈추고, 자신들이 말하는 그 ‘진리’가 법의 강제 없이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대에 올려야 한다. 법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혐오를 배설하는 것은 비겁한 도망일 뿐이다. 진짜 복음은 법이 허용하는 구역 안에서만 작동하는 생명 없는 구호가 아니라, 어떤 장벽도 뚫고 흐르는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여야 한다. 설령 진짜 악법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인 구호로 법을 막겠다고 소리칠 것이 아니라 그런 법과 상관없이 복음을 외치고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것이 진짜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