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의 열두 번째 봄

망각을 강요하는 야만인들

by 강훈

페이스북의 예전 프로필 사진을 열어보니 노란 리본이 보인다. 잊지 않겠다는 글씨도 보인다. 아마도 4월이 되면 1년 내내 생각하지 않다가 남아있는 양심에 찔려 잠시 생각 정도는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4월이 되기 전에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내 삶에 담아보려 한다.

벌써 열두 번째 봄이 오고 있지만, 누군가에겐 그날의 바닷물 온도가 여전히 살갗을 파고드는 현재진행형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가 목격한 가장 잔인한 폭력은 물리적 충돌이 아니라, 고통의 유효기간을 제삼자가 제멋대로 설정하고 “이제 그만하라”고 종용하는 오만이었다.


- 고통의 유효기간을 채점하는 사회

해마다 4월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른다. 12년이라는 숫자를 근거로 타인의 슬픔에 강제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시도다.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시간은 치유의 약이 아니라, 부재를 증명하는 잔인한 쌓임일 뿐이다. 누군가의 삶의 전부가 사라진 사건을 두고 ‘적당히’를 논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가해다. 슬픔은 정해진 양을 쏟아내면 바닥나는 저수지가 아니지 않은가.


- ‘신(神)’의 오용

“그만하라”는 요구는 관찰자의 불편함을 제거하려는 이기적 방어기제다. 누군가의 고통이 내 일상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파편화된 심리다.

여기에 종교의 탈을 쓴 폭력이 가세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기만적인 수사로 비극을 정당화하거나, “천국 갔으니 슬퍼하지 말라”며 애도의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는 명백한 신성모독이다. 고통받는 자 곁에서 함께 우는 것이 복음의 본질이라면, 고통을 교리로 덮어버리는 자들은 복음의 살인자들이다. ‘시체 장사’라는 입에 담지 못할 언사로 유가족을 난도질한 이들은, 도대체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인가. 정말 그치들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다.


- 진짜 침묵해야 할 자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주어를 바로잡아야 한다. 침묵을 강요당해야 할 이들은 자식을 잃고 12년을 버텨온 유가족이 아니다. 타인의 참사를 정치적 도구로 비하하고, 고통의 깊이를 산술적으로 계산하며, 신의 이름을 빌려 저주를 퍼부은 자들이다.

인간의 언어가 타인의 슬픔에 닿지 못할 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예의는 ‘경청’이지 ‘훈수’가 아니다. 유가족의 외침은 보상을 바라는 악다구니가 아니라, 다시는 이런 야만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본질적인 저항이다. 그 저항을 소음으로 치부하는 이들이야말로 인간 존엄의 마지노선을 넘어선 쓰레기들이다.


- 기억의 주권을 되찾는 일

성인이 된다는 것, 혹은 깨어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 대신 그려준 ‘슬픔의 안내지도’를 거부하는 일이다. 고통은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견뎌내는 것이며, 12년이 아니라 120년이 지나도 그 아픔은 정당하다.

우리는 “이제 그만하라”는 명령 앞에 단호히 말해야 한다. “기억은 나의 권리이며, 당신의 침묵이 나의 슬픔보다 먼저”라고. 4월의 바다는 여전히 차갑고, 그 차가움을 잊지 않는 것이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길 중의 하나이다. 침묵해야 할 것은 상처 입은 자의 신음이 아니라, 그 상처를 비웃는 자들의 독사 같은 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