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에 대한 글을 올린 후에 다양한 댓글이 등장했다. 개인적인 예상보다 긍정적인 댓글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은 희망적이었다. 그리고 부정적인 댓글은 예상했던 것을 빗나가지 않았다. 딱 생각했던 정도의 내용이었다. 현재 생각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 것인지 아니면 극우 쪽으로 치우친 사람들의 일부 의견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들의 계정에 찾아가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참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 각자의 하나님이 말하는 ‘자기 확신’의 소음
차별금지법을 이야기 한 어제 글의 댓글 창은 거대한 ‘자기 확신의 전시장’이었다. 성경 구절을 덧붙이고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지만, 그 뜨거운 열기 아래 놓인 것은 결국 지독하게 사적인 편견일 뿐이다. 스스로를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리인으로 자부심을 가지며 비장하게 외치는 모습은 거룩해 보이려 애쓰는 연극과 같았다. 더불어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어떤 근거로 하는 이야기인지 알고는 있는지 궁금해지는 댓글도 존재했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는 확신이 타인을 정죄하는 쾌감으로 이어질 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일그러진 자아의 배설이다. 그 비장한 스탠스가 정말 하나님을 향한 열정인지, 아니면 배타적 우월감을 확인하기 위한 장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 존재하지 않는 유령과 싸우는 선동가들
더욱 기이한 것은 그 확신의 근거가 ‘거짓’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체도 없는 ‘종교해체법’을 들먹이며 교인들을 광장으로 떠미는 목사들의 선동은 무지를 넘어선 기만이다. 그들이 법의 실체를 정말 모를까. 설령 그들의 우려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전의 문구 하나를 막기 위해 쏟아붓는 그 거대한 에너지는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과 체제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만 작동한다. 복음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타인의 고통 앞에서 그들의 열정은 너무나 쉽게 침묵으로 변한다.
- 가자(Gaza)의 비명과 교회의 비겁한 저울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 존중’의 민낯은 그들의 선택적 분노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정 소수자를 위한 법안 하나에는 나라가 무너질 것처럼 들끓으면서도,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는 가자지구의 비명이나 포탄이 떨어졌던 이란의 초등학교 참사를 향해서는 입을 닫는다. 먼 남의 나라 일이라서일까.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적 순결을 지키는 일이, 지금 이 순간 물리적으로 소멸해 가는 수천 명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생명을 향한 전쟁 반대를 외치는 것보다 혐오의 성벽을 높이는 것이 더 영적이라 착각하는 집단적 광기다.
- 무엇이 진짜 복음의 본질인가
신앙의 주권은 집단의 선동에 휘말려 유령과 싸우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은 ‘무엇이 더 중한가’를 스스로 묻는 분별력에 있다. 성소수자를 배제하려는 열정의 단 1%라도 전쟁터에서 사라지는 아이들을 위해, 포탄 아래 스러진 이웃을 위해 쏟았다면 기독교는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이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중요한 교리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거룩은 혐오의 언어로 무장한 비장함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 앞에 함께 통곡하며 평화를 구하는 용기다. 당신이 지키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그저 당신의 편안한 영적 요새인가.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침묵하는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