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목사라는 게 종종 불편하다

by 강훈

내 삶의 지도는 50년 넘게 ‘기독교’라는 단일한 생태계 안에서 그려졌다.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진 이 세계관은 나를 보호하는 요람이었으나,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때때로 나의 사유를 가두는 투명한 벽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삶에 대한 불평이 아니다. 한 인간이 50년 이상 호흡해 온 대기(大氣)가 95%의 기독교적 인프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때론 서글픈 자기진단이다.


- 문화적 자유와 영적 경직성 사이의 기묘한 담벼락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기독교인들도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굳이 종교 영화를 들먹이지 않는다. 인생 영화를 물으면 <쇼생크 탈출>이나 <어바웃 타임>을 말하며 눈을 반짝인다. 문화적 취향에서만큼은 각자의 인간적인 감동을 스스럼없이 공유한다. <십계>나 <벤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자신의 인생 영화라고 말하는 기독교인을 만나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뭐, 그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거다.

하지만 화제가 ‘신앙’이나 ‘목사’라는 존재로 옮겨가는 순간, 공기는 갑자기 경직된다. 사람들은 목사가 지극히 일상적이거나, 혹은 기존의 신앙 문법을 벗어난 행동이나 발언을 할 때 당혹감을 느낀다. “목사답지 않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당신은 이 울타리 안에서만 유효한 ‘영적 주파수’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다. 이 지점에서 목사는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집단이 기대하는 종교적 상징물로 고정된다.


- ‘신앙 콘텐츠’라는 안전한 도피처와 소통의 딜레마

나의 SNS는 이 95%의 인프라가 응집된 거대한 실험실이다. 그 안에서 소통의 통행세는 ‘신앙적 언어’다. 위로와 덕담, 혹은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법한 ‘은혜로운’ 콘텐츠를 내놓아야 비로소 사람들과 연결된다. 반대로 기독교적 세계관의 한계를 지적하거나, 신학 너머의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면 나는 금세 ‘불편한 존재’가 된다.

사회심리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은 인간이 사회적 상황에 따라 특정한 가면을 쓰는 현상을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라고 분석했다. 오랜 시간 목사로 살아온 나에게 요구되는 인상 관리는 지독하리만큼 일관적이다. 나는 이 안전한 가면 뒤에 숨어 사람들과 ‘신앙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정작 ‘인간적’으로는 고립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게 된다.


- 사고의 확장이라는 형벌과 5%의 숨구멍

기독교 세계관에 갇혀 있다는 자각은 나를 끊임없이 책장 앞으로 몰아넣는다.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을 읽으며 끙끙거리는 나의 몸부림은, 이 견고한 95%의 대륙에 작은 숨구멍을 내보려는 시도다. 하지만 50년의 관성은 무겁다. 새로운 지식을 접해도 결국 기독교적인 틀로 해석해버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이 세계관이 준 ‘안정감’이 얼마나 무서운 ‘한계’였는지를 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불편함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대중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목사의 ‘완벽한 확신’이 아니라, 함께 길을 잃고 함께 고민하는 ‘정직한 의심’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제 뻔한 위로보다는, 자신들의 삶을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대신 두드려주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 ‘목사다움’을 버리고 ‘인간임’을 선택하는 용기

나는 이제 95%의 익숙한 박수 소리에 안주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신앙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우는 일이다. 목사라는 페르소나 뒤에 숨어 ‘은혜로운 척’하는 연극을 멈추고,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교회의 부정적인 이야기까지도 담대하게 꺼내 놓으려 한다.

나의 글이 불편함을 준다면, 그것은 당신과 나를 가두고 있던 낡은 세계관의 유리벽이 깨지고 있다는 신호다. 위로와 감동의 콘텐츠보다는, 우리의 삶을 날것 그대로 직면하게 만드는 질문들을 던지고 싶다. 그렇다고 위로와 감동의 이야기를 안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나 또한 그런 이야기를 심하게 좋아한다. 50년 넘게 나를 키워온 이 생태계에 대한 나의 예의는, 이 세계가 가진 한계를 정직하게 고백하며 ‘5%의 낯선 세상’으로 한 발짝 내딛는 일이다. 차근차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