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합시다'라는 애매한 마침표

by 강훈

힘든 일을 겪는 이가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을 때, 목회자가 가장 흔히 내놓는 처방전은 “기도합시다”라는 한마디다. 이 말은 언뜻 거룩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화의 문을 황급히 닫아버리는 비겁한 ‘비상구’가 되기도 한다. 눈앞의 비극을 해결해 줄 능력은 없고(해결해 주고 싶겠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견딜 자신도 없을 때 꺼내 드는 종교적 방어기제이기 때문이다.


- 신앙적 위로라는 이름의 ‘영적 진통제’

어려움에 처한 이가 목양실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너무 쉽게 ‘긍정의 언어’를 처방한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기도하며 기다리자”는 말들은 듣기에는 경건하지만, 당장 숨이 넘어가는 이의 목을 조이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위로는 고통의 본질을 직면하기보다, 그 고통을 ‘신앙’이라는 보자기로 급하게 덮어버리는 행위에 가깝다. 목회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교인은 즉각적인 위로를 기대하는 이 기묘한 공생 관계 속에서 진짜 아파해야 함은 설 자리를 잃는다.


- 밝은 면의 이면

미국의 저명한 사회비평가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는 저서 <긍정의 배신(Bright-sided)>에서 무조건적인 긍정주의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 집요하게 파헤쳤다. 그녀는 암 투병을 하던 중, 환자들에게 가해지는 “항상 밝게 웃어라”, “병도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강요가 오히려 개인의 정당한 분노와 슬픔을 억압하는 사회적 통제 도구로 작동한다고 고발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권면은 자칫 고통의 책임을 개인의 ‘믿음 부족’으로 떠넘기는 잔인한 채찍이 된다. 에런라이크는 긍정주의가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지갯빛 내일의 약속이 아니라, “이것은 정말 불가능한 상황이며, 당신의 절망은 지극히 정당하다”는 냉정한 현실의 인정이다.


- 하나님은 ‘정답’이 아니라 ‘현존’으로 일하신다

C.S. 루이스(C.S. Lewis)는 아내를 잃은 뒤 쓴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에서 우리가 아는 뻔한 신학적 해답들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었으나 돌아온 것은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와 그 뒤에서 걸어 잠그는 빗장 소리”뿐이었다고 고백했다.

루이스는 슬픔을 미화하거나 신앙으로 급하게 봉합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 앞에 정직하게 머물렀다. 그는 결국 하나님을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법사’가 아니라, 인간의 처절한 고통과 함께하시는 ‘공감자’로 다시 만났다. 어쩌면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하는 태도는 냉소가 아니라, 루이스가 마주했던 그 ‘닫힌 문’ 앞에서 정직하게 서 있겠다는 결단이 아닐까. 신뢰는 화려한 기적의 약속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의 진실을 함께 공유할 때 비로소 싹트는 법이다.


- 힘들면 힘들어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제 ‘답이 없는 세상’에서 ‘답을 아는 척하는 사람’에게 지쳐 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으며, 고통을 성급하게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깊은 진실을 발견한다.

어려운 것은 어렵다고 말해야 한다. 힘든 것은 힘들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막막한 현실의 경계선에서 함께 서 있어 주는 것이 먼저다. 기도는 그다음이다. 아마도 기도가 먼저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치유되고 회복되는 일이지 정해진 순서대로 하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말로 다 할 수 없는 절망을 충분히 마주한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비명처럼 터져 나오는 ‘진짜 기도’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