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마주하는 수평적인 공기는 종종 나를 당황하게 만든다. 얼마 전, 한 한국인 중년 여성이 함께 일하는 히스패닉 청년을 보며 혀를 찼다. “쟤들은 왜 저렇게 싸가지가 없지?” 그 한마디에는 ‘나이 어린 자가 마땅히 보여야 할 복종’이 생략된 것에 대한 강한 불쾌감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청년은 무례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 몰지각한 오해의 틈새에서 나는 우리가 신봉해 온 ‘싸가지’라는 단어의 무례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싸가지’를 도덕이나 인성의 문제로 치부하지만, 그 본질을 파고들면 그것은 지독히도 정치적인 단어다. 나보다 나이가 적거나 지위가 낮은 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너무도 손쉽게 이 낙인을 찍어 상대를 제압하려 든다. 이것은 상대의 인격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가진 서열의 우위가 흔들리는 것에 대한 옹졸한 두려움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싸가지’를 운운하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고착된 방어기제에 가깝다. 나이와 경력이 유일한 훈장인 사람들에게 아랫사람의 수평적 태도는 자신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도발로 읽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마주하는 리스펙(Respect)은 나이라는 계급장이 주는 자동 결제 시스템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의 인격이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상호적인 수확물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대접을 요구하지 않고,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들의 관계망 앞에서 나는 내가 내면화해 온 수직적 질서가 얼마나 비본질적인 것인지 깨닫는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오십 년 넘게 학습해 온 이 서열 문화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대접받으려는 사람’으로 묶어두고 있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의 당당함을 ‘싸가지 없음’으로 오독했던 나의 시선은 참으로 무례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나 경험이 적은 이들을 대할 때, 나는 늘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은밀한 전제를 깔고 있었다. 그들의 서툰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혀를 찼던 순간들, 내 조언이 정답인 양 밀어붙였던 그 태도들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뜨끔한 자책으로 가득 찬다. 예의가 진정 인간에 대한 예우라면,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의미의 ‘싸가지 없음’이다. 존중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 수평적 가치여야 한다.
결국 누군가를 향해 “싸가지 없다”고 소리치고 싶을 때, 우리가 진정으로 들여다봐야 할 곳은 상대의 태도가 아니라 나의 옹졸함이다.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혹은 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타인을 낙인찍는 행위는 내가 가진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비겁한 저항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싹수가 푸른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상대의 존엄을 먼저 살피는 사람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연마해야 할 기술은 권위를 세우는 법이 아니라, 내 안의 권위주의를 스스로 도려내고 타인을 동등하게 환대하는 법이다.
나는 오늘 거울 앞에 서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나보다 어린 이들에게 ‘예의 바른’ 어른인가.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이 듦이 면죄부가 되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물어봐야 한다. 우리의 예의가 오직 위만을 향해 고착되어 있지는 않은지, 아래를 향한 우리의 시선이 너무도 무감각하게 메말라 있지는 않은지를 말이다. 진정한 리스펙은 고개를 숙이는 자가 아니라, 먼저 손을 내미는 자의 겸손에서 완성된다.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의 존재를 응원해 줄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연대가, 이 고단하고 치열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