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

by 강훈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었고, 가난했기에 서로의 온기만으로 충분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의 관계는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성립되는 그런 특별한 관계였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군가 ‘특별한 무엇’이 되어버린 순간, 그 투명했던 서로의 관계가 불투명한 벽으로 변한다. 자의든 타의든 연락이 끊기고 관계가 흩어지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자연스러운 물리법칙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관계의 소원함을 개인의 변심이나 배신으로 치부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이 이별은 지독히도 구조적인 결과다. 부르디외는 인간이 자라온 환경과 계층에 따라 형성되는 취향, 습관, 사고방식을 ‘아비투스(Habitus)’라 불렀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 우리는 같은 아비투스를 공유하며 서로의 언어를 이해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다른 계층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의 아비투스는 고착된 과거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의 문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취향이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이 변하며, 대화의 주제가 옮겨가는 과정은 그에겐 ‘성장’이지만, 남겨진 나에게는 ‘외면’으로 읽힌다. 서로 다른 궤도로 진입한 두 행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 각자가 발 딛고 선 세계의 중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과 서운함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성공에 대한 시샘이라기보다, 한때 영혼을 나눴던 이와 더 이상 주파수를 맞출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마음 시린 상실감에 가깝다. 세상은 성공한 자의 서사만을 기록하고 기억하지만, 누군가 ‘무엇’이 되기 위해 기꺼이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시간은 늘 무관심 속에 방치된다.


내가 느끼는 민망한 통증인 자격지심은 사실 이 부조리한 사회 구조가 내 맘 속에 남긴 흉터다. 성과가 곧 존재의 증명이 되어버린 세상의 질서 속에서,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자리를 지키는 것은 패배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이 ‘무엇’이 되기 위해 가졌던 그 뜨거운 열망의 씨앗은 바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텅 빈 대화 속에서 싹텄을 가능성이 크다. 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성장을 지탱해 준 가장 단단한 지반으로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그들의 소식을 궁금해하지 않기로 한 나의 결심은 민망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영토를 지키려고 애쓰는 태도다. 타인의 화려한 성취라는 빛에 눈이 멀어 나 자신의 소박한 일상을 초라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 물론 정말 솔직하게는 그게 잘 안되어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다. 하하하~

‘무엇’이 된 자들이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 몸부림칠 때,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롯이 나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려 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시절의 그들은 아마 나와의 기억을 낡고 깊은 서랍장에 넣어두었을 것이다. 그것은 망각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잠시 덮어둔 시절의 기록이다. 나 역시 그들을 미워하거나 그리워하는 데 에너지를 쏟기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아무것도 아닌 자리’의 고요를 즐겨보려 한다.


무엇이 되어야만 의미 있는 삶이라는 이야기도 물론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에 맞서,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증명해내는 것.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시절을 여전히 살면서 해낼 수 있는 내 삶에 대한 존중이다. 나의 외로움은 결핍의 증거가 아니라, 난 나대로 나만의 시간에서 내 세상을 살아내고 있다는 신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