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견디는 힘으로서의 믿음

by 강훈

성공의 도구로 전락한 믿음만큼 서글픈 것도 없다. 내가 원하는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확신은, 종종 신앙이라는 이름표를 단 ‘자기 암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진짜 믿음은 역설적이게도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침묵의 한복판에서 그 진가를 드러낸다. 간절한 기도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인생의 문제가 여전히 요지부동일 때조차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내는 힘.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의 진짜 얼굴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믿음을 ‘성공을 위한 보증수표’처럼 여긴다. 간절히 믿으면 병이 낫고, 사업이 번창하며,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갈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은 불안한 미래를 견디게 하는 심리적 위안은 줄 수 있지만, 정작 ‘응답 없는 현실’ 앞에서는 쉽게 무너져 내린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곧바로 배신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했던 셈이다. 믿음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는 순간,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거대한 자판기로 전락하고 만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저서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믿음을 단순히 ‘무언가 일어날 것을 믿는 일’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믿음은 “궁극적인 관심에 붙잡힌 상태”를 의미한다.

틸리히는 인간이 겪는 가장 큰 불안은 ‘허무’와 ‘의미 없음’에서 온다고 분석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존재의 용기, 즉 아무런 보상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며 버티는 힘이다. 틸리히의 관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믿음은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사건’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허무한 순간에도, 나를 붙들고 있는 거대한 생명의 근원을 신뢰하며 오늘을 살아내는 용기 그 자체다.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인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믿음을 “객관적인 불확실성 속에서 단행하는 도약”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저서 <공포와 전율>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믿음의 비합리성을 파헤친다.

키르케고르가 강조한 것은 ‘계산’이 아니다. 만약 결과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나 ‘확률’에 불과하다. 진짜 믿음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위험한 도박과 같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은 하나님이 부재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인간 그 자체로 마주 서는 가장 거룩한 시간이다.


대중은 늘 확실한 대답과 눈에 보이는 결과를 원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은 “당신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덕담에 있지 않다. 오히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당신은 여전히 존엄하며,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진실에 가깝다.

믿음의 주권은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을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믿음은 상황을 바꾸는 마법 지팡이가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나 자신의 중심을 바꾸는 일이다. 기적이 일어날 때만 감사하는 유아기적 종교에서 벗어나, 침묵 속에서도 길을 걷는 어른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결국 믿음의 완성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