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가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지 더 깊게 알았더라면, 석 달 동안 두 번의 이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분명 다른 방도를 찾아 움직였을 것이다. 2년 전 여름, 단지 내에 큰 불이 났다. 당시 난 한국에 있었고, 문자 메시지를 통해 짝꿍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목조 건물 3층 빌라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통째로 타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단지 조성을 담당했던 회사는 소방 안전 시스템 관리를 위해 모든 건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소방 보수 관리에 들어갔다.
그 해 가을,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건물 또한 보수해야 하므로 대략 3개월 정도 단지 내 다른 건물로 잠시 이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귀찮은 편지를 받아 들고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만족도가 높고, 다시 집을 알아보고 움직이는 게 영 내키지 않아 그만두었다. 이사 과정에 필요한 인력 및 자제 그리고 이사 갈 집까지 모두 관리 회사에서 마련해 준다기에 그러려니 하며, 일상을 이어갔다.
그렇게 일 년 여가 지나 임시 거처가 정해졌고, 이삿날이 잡혔다. 크고 작은 박스와 주방 용품을 포장할 종이와 대자 사이즈 뽁뽁이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그제야 현실감이 들면서 머리가 지끈 거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짝꿍은 한참 짐을 싸야 하는 시기에 이탈리아 출장을 앞두고 있었으니, 혼자 짐을 쌀 생각에 한숨이 먼저다. 둘이 사는 집에 짐이 얼마나 많겠냐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주 큰 오산이었다. 곳곳에 숨어있는 짐들을 꺼내 놓으니 대략 박스로 50개가 나왔다.
짐을 싸며, 켜켜이 쌓아 놓은 시간의 흔적을 읽는다. 잘츠부르크에서 사 온 오르골, 로마에서 들고 온 피노키오, 파리에서 집어 온 나무 고양이, 포르토에서 함께 온 닭... 작고 귀엽지만 쓸 곳이라고는 아무짝에도 없는 온갖 동물들이 상자 가득이고, 짝꿍은 나폴리탄 커피 메이커인 쿠쿠 멜라라는 빈티지 커피메이커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 그 쿠쿠 멜라만 해도 커다란 상자 하나 가득이다. 한국에서 들고 온 꽹과리 접시를 시작으로 시대 별 찻 잔과 물컵 그리고 차 주전자까지... 많다. 게다가 우린 각자 본국에 다녀올 때마다 먹을 것만큼이나 책을 가져 나르는 취미가 있다. 박스 스무 개가 우리의 그 부지런함을 잘 말해준다.
이삿짐을 옮겨주실 분들은 거실 가득 주방 가득 쌓인 상자들을 보며, 이것들이 다 어디서 나온 거냐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납공간이 공학적으로 잘 짜인 집이라 가능하다는 농담으로 약간의 민망함을 지워버렸다. 임시 거처에서도 우리는 3개월을 살아도 제대로 살아야 한다는 열의로 쓰지 않는 계절 용품은 제외하고는 기운차게 짐을 다 풀어 정리했다.
시간은 계획보다 훨씬 빨리 흘렀다. 임시 거처가 마음에 들어 그곳을 새로 계약해 살까 고민했지만, 불편한 부분이 좀 있어 원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이삿날이 잡혔다. 그래도 한 번 해 봤다고 진화된 이삿짐 분류 노하우로 처음보다 훨씬 빠르고 수월하게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삼 개월 간 두 번의 이사라는 수고로움은 우리가 함께 쌓아 온 삶의 취향을 바라볼 수 있는 뜻밖의 기회를 선물했다.
읽을 책이 마르지 않는 거실에 있다 보면, 혼자라도 심심할 틈이 없다. 런던 살이를 시작하며, 책을 읽는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으로 시작된 억지 춘향 놀이였지만, 책 한 권 완독 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책과 교감하는 깊이가 깊어질수록 새로운 책을 만날 때 느껴지는 흥미로운 감정에 점점 빠져들었다. 영어책 읽는 게 어렵다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지면, 얼른 한국 책을 집어 들고는 한 여름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듯 시원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영어 문장이 웬일로 거침없이 몸으로 흡수될 때면, 뿌듯한 즐거움에 더욱 푹 빠질 수 있다.
유독 세월을 입은 물건들이 많다. 허전한 주방 수납장 위를 채우고 있는 쿠쿠 멜라는 손잡이 모양, 커피가 나오는 주둥이 모양에 따라 만들어진 시기를 읽을 수 있다. 저렇게 오래된 물건이 커피를 제대로 뽑아낼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럴 때면 하나를 골라 커피를 내려본다. 물을 채워 넣는 위치, 잘 맞게 갈려진 커피콩 그리고 불의 세기 등 오랜 세월만큼이나 섬세한 요령을 필요로하긴 하지만 내려진 커피맛은 그만큼 만족스럽다. 커피 메이커 하나를 두고 영화도 찾아보고, 커피콩을 어떻게 갈아야 하는지, 손잡이 모양을 보며 언제 만들어졌는지 공부해보는 등 재미가 넘쳐난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닮아 있다고 한다.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집은 아름답지만, 사는 이의 즐거움이 묻어나는 집은 매력적이다. 온전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집이다. 하지만 사는 이의 재미가 묻어나는 집이야말로 생기 넘치는 진정한 생활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삿짐을 싸고 풀며, 겹겹이 쌓아온 재미를 읽다 보니 '집이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가', '어떤 공간이길 바라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집에 대한 사람들의 대화에는 보통 투자와 관련된 물질적 가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전에 자신이 머무르는 공간에 쓰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그 공간에서 펼치고 싶은 즐거움이 무엇이길 바라는지 고민해 보는 시간도 꼭 따라와야 할 것이다. 집을 갖기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공허한 말만 지어내는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그러고 보니 석 달간 두 번의 이사가 남긴 건 꽤나 철학적인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