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겨울을 지켜주는 작은 것들

춥지만 그래도 괜찮아

by 김라희


여름 내 사랑은 지난 지 오래고, 가을 내 추억은 이미 저만치 물러나 버렸다. 12월에 태어났지만, 지독히 추위를 타는 탓에 겨울이 다가온다 싶으면 월동 준비에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올해 11월, 런던은 이상하게 푹하다. 이 즈음이면 습하고 찬 공기가 스멀스멀 뼈 속을 파고들며, 입술은 푸르뎅뎅해져 히터를 끼고 살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히터는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만 집을 달궜고, 보송보송 수면 잠옷 아래 반팔만으로도 찬 공기를 견딜만하다.


여름에 온 몸은 무장해제다. 느슨하게 풀어진 근육들 사이로 긴장감은 자취를 감추며, 마음은 질퍽한 공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붕붕 날아다닌다. 맞다, 여름을 사랑한다. 여름의 밤공기는 지나치게 달콤하다. 그래서 좋다. 얇은 옷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여름을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추억 서린 가을이 시작되면, 귓가를 흐르는 음악 비트는 느려지고, 생각은 깊어진다. 해마다 만나는 단풍의 붉은 피날레에 덩달아 마음도 찐해진다. 그렇게 두 계절을 보내고 나면 저벅저벅 겨울이 다가온다.


이제 겨울을 살아내기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여름을 사랑하듯 겨울을 바라보며 월동 준비를 시작하자. 김장하며, 겨울을 준비하는 엄마의 시간은 런던에선 흔한 그리움이다. 붉은 기 가득 고춧가루에 곱게 채친 채소를 비벼대는 양념 냄새를 코 끝에 달고 겨울맞이를 시작한다. 가만히 생각하니, 런던의 겨울을 지켜주는 작은 것들이 꽤나 많다. 올해는 런던을 따뜻하게 달궈주는 작은 것을 먼저 챙겨보려 한다.





짝꿍보다 더 애틋한 사이, 핫 보틀(Hot Bottle)


추위를 지켜줄 우리 집 든든한 뜨끈뜨끈 핫 보틀

처음 영국에 왔을 때, 이 핫 보틀을 발견하고는 이 무슨 번거로운 장치인가 했다. 뜨거운 물을 넣어 무겁게 안고 잘만큼 겨울이 그리 시린가? 그렇게 여겼다. 대학 시절 엘씨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하며, 핫 보틀의 존재를 알았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의식처럼 주무시기 전 항상 전기포트에 물을 데워 핫 보틀을 가득 채우셨다. 고무 재질인 핫 보틀은 뜨거운 물이 들어가면, 특유의 고무 냄새가 났다. 보들보들 하얀 털옷을 입은 핫 보틀을 품에 안고 파자마를 입은 모습의 엘씨 할머니는 매일 밤 그렇게 굿나잇 인사를 건네셨다.


할머니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핫 보틀을 선물해 주셨다. 따뜻함을 포기할 만큼 고무 냄새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 바틀을 껴안고 잠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할머니와 함께 살며 전기세 혜택을 보던 터라 히터는 빵빵하게 틀고 지낼 수 있어 그 핫 보틀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할머니 집을 나와 삐그덕 거리는 오래된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높은 천정이 마음에 들어 이사했는데, 웬걸 너무너무 추웠다. 겨울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입술은 푸른 끼를 띤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가 주신 핫 보틀을 구석에서 꺼내 전기 포트를 달궈 뜨거운 물을 담아본다. 세상에나 이런 신박한 것이 있나. 고무 냄새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손을 타고 올라오는 따뜻한 기운과 한 순간에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여 년간 핫 보틀을 일 년에 최소 5개월은 부둥켜안고 산다. 겨울이 되면 짝꿍보다 더 애틋한 사이로 지내며, 추위를 견디고 있다. 내 사랑 핫 보틀, 지금도 내 곁을 따습게 달구느라 바쁘다.



꾸덕한 SAID의 핫 초콜릿


맞다! 겨울이 오면 근사하게 즐길 수 있는 핫 초콜릿이 있다. 티 스푼으로 꾸덕하게 떠먹는 핫 초콜릿의 질감에 푸욱 빠져 겨울이 오기 시작하면 일부러 소호에 나간다. 이탈리안 남편은 이 집 핫 초콜릿을 먹을 때마다 토리노에 꼭 가자며, 핫 초콜릿은 그곳이 제일이라 한다. 그러면 난 런던 소호에서 먹는 이것 한 잔에도 온몸을 부르르 떨며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돌려준다.


어릴 적 네스퀵, 스위스 미스의 핫 초콜릿은 사치였다. 특별한 밤에만 타 먹을 수 있었다. 행여 파우더를 듬뿍 넣어 두터운 질감으로 타 먹기라고 했다간 엄마한테 혼이 나는 그런 아껴먹어야 할 간식 중 하나였다. 우유에 쵸코 색을 잠깐 입힌 듯 밍숭한 핫 초콜릿에도 행복했는데, SAID 이 곳의 핫 초콜릿은 진짜 초콜릿을 녹여 만들어 내었다. 뜨끈하게 데워진 이 달큰한 것을 한 입 먹으면 온 몸 달라붙었던 추위는 금세 사라진다. 아니 그 추위 덕분에 이 꾸덕한 달콤함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다. 핫 초콜릿도 기억하자!


[사진: STEPHANIE LOUISE GREEN]




알잖아, 귤!


조물닥조물닥, 새콤한 향과 시원하게 톡 터지는 귤 맛이 빠진 겨울은 상상할 수도 없다. 며칠 전, 제주도에서 햇귤 한 박스를 주문해 두었다는 엄마의 목소리에 이미 겨울이 왔구나 했다. 얼마나 귤을 좋아했는지 오른쪽 엄지손톱 밑은 귤껍질을 까대느라 겨울이면 항상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한 참 먹성 좋던 사춘기 시절에는 한 박스 소복이 담긴 귤은 우리 집에서는 일주일도 버티지 못했다. 귤 많이 먹으면 얼굴 노래진다는 아빠의 엄포도 소용없다. 농구와 배구에 한 참 빠져, 허재와 신진식을 바라보며 까먹던 귤이 있어야 겨울이지!


런던에서도 귤 사랑은 여전하다. 한국만큼 까기 쉬운 귤은 겨울이나 되어야 만날 수 있다. 만다린, 클레멘타인, 텐져린 등 비슷한 듯 다른 가지각색의 귤 패밀리를 만나볼 수 있다. 오렌지는 사시사철 만날 수 있지만, 껍질이 두터워 먹기 불편해 손이 잘 가지 않는다. 한 겨울 런던에서 귤을 고르는 일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까기도 편하고, 신 맛보다 단 맛이 더한 클레멘타인을 골라야 하니 말이다.


슈퍼마켓에 가면 때론 박스에 담아두고 가격을 좀 올려 받거나, 망사에 넣어 가격을 좀 내려받는다. 집에 긴급 귤 수혈이 필요하면, 급하게 슈퍼마켓으로 달려가지만, 과일도 골라먹는 재미가 있어야 제 맛인지라 터키 사람들이 차려 놓은 과일 가게를 주로 이용한다. 짝꿍은 과일을 참 잘 고른다. 그가 고른 과일에 실패율은 10%도 되지 않으니. 이제 슬슬 클레멘타인을 찾으러 나서야겠구나.




무진에만 안개가 있는게 아니다


아, 무진보다 런던의 안개가 더 유명하려나? 김승옥 소설, 무진기행을 좋아한다. 특히 무진의 안개를 묘사한 부분을 자주 읽는다. 런던, 겨울 안개의 오묘함에 빠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매일 흐린 회색의 도시에 묻혀 사는 일에 안개는 거추장스러운 일상 방해꾼일 뿐이었으니. 시월이 끝나가면, 안개가 내리기 시작한다. 모두가 잠든 밤 사이 도둑고양이처럼 내려와 모든 것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아침 해가 반짝 나오면 안개가 걷히련만, 런던의 안개는 정오를 향해도 그 입김을 거두려 들지 않는다. 재작년 겨울, 아침 산책으로 근처 공동묘지에 간 적이 있다. 유럽 도시들은 묘지를 곁에 두고 사는 터라 흔히들 생각하는 공동묘지의 으스스한 무서운 기운보다 일상 속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는 장소로 친근하다. 나 또한 런던 생활이 길어지며 묘지를 걷는 일을 평범한 공원 산책하듯 한다.


간 밤의 입김이 무겁게 공원을 뒤덮던 그 날 이른 아침 묘지의 분위기는 한층 더 깊어졌다. 가깝던 걸 멀리 두고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답답증도 밀려온다. 그러다 해와 바람이 안개를 거둬가길 바라본다. 그렇게 걷다 보면 안갯속 축축함이 옷에 붙는다. 이제 받아들일 때다. 안개와 함께 산책하는 아침을 이제 그리게 된다.


안개로 삥 둘러싸인 공원길에 반드시 필요한 게 하나 있다. 장화! 잔디가 무성한 공원길에 안개가 내렸다는 건 온통 땅은 진흙밭으로 변했다는 소리다. 안갯속 저벅한 길을 걸어 들어갈 용기는 장화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비가 많은 영국에서 장화는 사시사철 필수지만, 안개 내린 겨울 공원을 좋아하게 된 나에게 장화는 월동 준비를 위한 필수 장비가 되었다. 올 해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하나 구비하고 싶다. 종아리까지 오는 장화 속으로 가끔 진흙이 움펑 들어가면, 얼음장보다 더 쨍한 냉기와 질퍽함에 안개를 감상하는 마음이 상하곤 했으니.


[사진: 김라희]




깜깜한 도시를 밝히는 크리스마스 불빛


채도가 낮은 런던 겨울, 낮과 밤이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어둠에 눈은 점점 약해졌다. 이제 조금만 해가 반짝해도 눈물이 흐른다. 선글라스 낀 외국인들 멋 낸다 욕할게 아니었다. 눈이 약해지니 한국 사람인 나도 선글라스는 이제 필수다. 어차피 까만 낮에 밤이 온들 무슨 상관이겠냐. 오후 3시면 밤이다, 런던은. 다음 날 아침 7시가 넘어야 빛이 밝아온다. 하루 8시간 동안만 빛을 바라보면, 긴 어둠을 어쩌지 못해 우왕좌왕하던 초창기 런던 살이가 떠오른다.


크리스마스 전, 어둠이 내리면 일부러 시내에 나간다. 반짝이는 불빛에 붙어 하루살이처럼 그 밝음을 따뜻해하며 복잡한 거리를 서성인다. 11월 시작과 함께 거리는 온통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눈이 부시다. 옥스포드 서커스를 중심으로 리젠트 스트릿, 뉴 본드 스트릿 등 가는 길마다 줄 선 거리를 밝히는 장식들에 찬 바람은 잊는다. 신비롭게 반짝이는 그 불빛에 마음을 달구고, 홀리데이 분위기를 만끽하는 시간이야말로 런던의 겨울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털모자 하나면 족하다. 서울에 살 때 모자는 야구모자 밖에 쓰지 않았는데, 이곳에 살면서 겨울 털모자는 꼭 필요하다. 겨울 기온은 한국보다 높지만 습한 공기와 바람 덕에 오랜 시간 크리스마스 장식을 구경하려 바쁘게 걸어 다니려면 털모자는 꼭 있어야 한다. 빨간 모자를 좋아한다. 재작년에 짝꿍이 선물해 준 이 모자는 어느 옷에나 잘 어울린다. 그리고 엄마가 떠 주신 털모자도 요긴하다. 조금 커서 헐렁이긴 하지만 도톰하고 야무지게 만들어져 한 겨울에 쓰고 나가도 뜨뜻한 온기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남아있다. 이것들은 벌써 꺼내 손이 닿기 편리한 자리에 잘 두었으니, 준비 끝!


[사진: secret london]





오랜 시간 런던에 지내다 보면 10월부터 겨울을 걱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짝꿍은 사랑해 보다 "추워"를 더 먼저 배웠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반쪽을 두었기에 어쩔 수 없는 순서다. 긴 어둠과 추위를 또 어떻게 지내볼까 염려하던 마음이 브런치 하면서 월동 준비를 끝낸 덕에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올 해부터는 "추워, 추워를 되뇌며, 차가워진 손발만 동동일게 아니라 "춥지만 괜찮아"라는 더 적극적인 마음으로 런던 겨울을 달구는 작은 것들을 찾아 나서봐야겠다. 지금도 머릿속을 맴도는 이름들이 많은 걸 보니, 런던의 겨울은 너무 춥지만 올 해는 괜찮을 것 같다. 그래 괜찮다! (음...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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