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한 결 부드러워졌다

꿈의 베네치아를 우연히 런던에서

by 김라희


이탈리아 여행을 시작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무엇이든 방대한 그곳을 얕게 감탄하며 지나치기보다 깊은 울림의 감동을 길게 남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드디어 몇 해 전부터 시간만 나면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시작했다. 기다려 온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매 여행에서 얻는 만족감과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북쪽부터 남쪽까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각 지방마다 고유의 특색이 얼마나 진한지 곳곳을 닿는 발걸음은 모두 소중하게 남는다. 걸쭉한 사투리와 다채로운 음식은 눈과 귀, 코와 입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기본이요, 켜켜이 역사를 입은 건축물과 조각상을 따라다니다 보면 환상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간 듯한 착각까지 들게 한다. 이탈리아는 그야말로 공감각적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유난히 보고 싶던 베네치아는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항상 관광객이 너무 많다는 핑계가 베네치아로 향하는 발목을 붙잡곤 한다. 이탈리아 중소도시의 조용한 매력에 푹 빠져 있는 이유도 한몫 거둔다. 비범한 수상 도시, 베네치아를 만나지 않고도 이탈리아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그 아쉬움과 동경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멋있는 도시 한 곳 정도는 간절히 보고 싶은 그런 곳으로 남겨 두는 것, 그것도 근사하지 않을까 하는 괜한 멋 부림이다.





런던에 살다 보면 의외의 행운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예술을 나누는 관대함이 가득한 이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화를 마주친다거나, 한 송이 꽃을 실물보다 더 깊은 색으로 표현한 정물화와 조우한다거나 혹은 잊고 있던 훌륭한 작품과 다시 만날 수 있는 우연함이 그것이다. 트래팔가 광장, 엄청난 작품을 웅장한 건물에 품고 있는 내셔널 갤러리는 그 행운과 부딪힐 확률을 더욱 올려주는 자비로운 장소다.


미로처럼 얽힌 방과 방을 다니다 보면 시대를 뛰어넘는 이야기 가득한 작품을 실컷 만난다. 런던에 살아 감사한 건 언제든 여유롭게 이 방을 넘나들며, 찬찬히 그림을 만날 수 있다는 행운이다. 가끔 아트 콜렉터가 된 듯 홀로 멋부림을 다시 부려본다.


그러다 어느 날, 38번 방 우연처럼 꿈에 그리는 베네치아를 만났다. 그림 속 축제의 함성 소리에 갑자기 흥이 오르기 시작한다


[ Canaletto | A Regatta on the Grand Canal, about 1740]


38번 방에서 만난 그림은 곤돌라 경주가 한창인 축제의 베네치아였다. 18세기 풍경화의 대가 카날레토의 작품으로 베네치아 중요 연중행사 중 하나인 곤돌라 경주를 보기 위해 모인 군중과 화려한 장식의 곤돌라로 가득한 거대 운하 (Canal Grande)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사진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진 이 풍경 마주하니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느낀 공감각적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느긋하게 누구의 방해도 없이 세세히 그림을 둘러본다. 숨은 그림이 하나 둘 찾아지듯 무수한 이야깃거리들이 쏟아진다.



그림 속 구름을 가만히 올려다보면 2월 그 날의 맑은 공기와 찬 바람이 어느새 볼에 와 스치고, 아래쪽 중앙 곤돌라 두 대가 치고받을 기세로 만들어낸 물살 속엔 곤돌리에의 팽팽한 경쟁심이 느껴져 덩달아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선착장 곤돌라 위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응원의 아우성이 고스란히 들리고, 아치형 창문마다 걸린 색색의 차양에는 축제의 발랄함이 묻어난다. 그 정점에 화려한 장식의 커다란 흰색 곤돌라가 있다. 저 환하게 빛나는 옷을 입히는 동안 사람들은 얼마나 신이 났을까. 누군가는 고단하다 불평도 했겠지? 이렇게 그림을 산책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베네치아 축제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카날레토는 극도의 자세한 풍경 묘사 덕분에 돈을 아주 잘 벌었다고 한다. 사실적 아름다움을 담은 실력 덕에 그의 그림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타 유럽 국가 귀족들이 선호하는 최고의 기념품이었다. 특히 영국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물 위의 마법 같은 도시 베네치아의 풍광적 아름다움은 물론 이탈리아인들이 만든 솔직한 감정의 풍요로움이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 있으니, 채도 낮은 정적인 나라 영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어찌 그것을 함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림을 감상하는 취미는 런던에서 얻은 소중한 것 중 하나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베네치아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왜 이곳 런던에 터를 잡고 싶었는지 답을 듣는 듯하다. 런던은 나에게 일상이 가득 담긴 곳이기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 런던의 오래된 튜브(지하철)에 몸을 싣다 보면, 왜 여기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지, 먹고 싶은 식재료에 그리움이라도 올라오면 부모님이 계신 고향 서울은 왜 떠나온 건지 의문만 가득일 때가 종종 생긴다.


그럴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일상이 묻어나는 도시는 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서울에서 일하며, 부모님 곁에서 지낼 때에도 일상의 팍팍함이 마음속 고구마처럼 얹힐 때면, 어딘가로 떠나고픈 심정만 가득 품고 살지 않았냐며 그 때를 떠올린다. 결국 어디에 있던 문제는 마음이다. 바스락 진 일상 속 자신만의 촉촉한 단비를 찾아내는 유쾌함이야 말로 매일을 살아내는 힘이라 여긴다. 꿈처럼 그리는 베네치아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근처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림을 즐기는 취미를 갖게 해 준 런던에 다시 감사한다. 삶이 한 결 부드러워졌다.



[사진: 런던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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