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은 날

그런 날을 살아가다 보면

by 김라희


유난히 무거운 머리를 이고는 하루종일 대놓고 게으름을 피는 중이다. 엄마는 큰 수술 후 약 한달을 꼬박 병원신세 중이다. 드디어 내일이 퇴원날이고, 다음 주에 항암을 위한 재입원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만은 부디 작정하고 좀 쉬어보자 한다. 그렇게 채 십분을 누워 뒹굴거렸을까? 다시 머릿속은 곧 돌아가야 할 런던, 그 일상에 대한 고민으로 꽉 차 버림을 알아챈다. 좀 쉬자 싶었는데 그것도 맘처럼 쉽지 않구나. 서울 여기는 친정집이 있는 고향이니 널부러져 있어도 세상 가벼운 마음으로 있다갈 수 있는데, 런던 거기는 아니다.


일상이 있기에 시간을 쪼개쓰고, 현실적인 문제들에 골치를 앓아야 하는 곳, 완벽하지 않은 하루가 매일인 곳, 그곳이 런던이다. 가을이 되면 회색하늘이 거의 매일이다. 감감한 어둠을 맞이할 채비를 단단히하고 가야겠구나. 부슬부슬 이슬비, 주적주적 가랑비에 우산을 내어 쓰기도 어중간한 그런 날에는 그저 부스스 내리는 비를 온 몸으로 맞으며 걸을 수 밖에. 런던 날씨를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이미 무거운 머리는 더 무거워진다.






영국 동남쪽 끝에는 콘월이라는 아름다운 해안 도시가 있다. 그곳의 겨울은 매운 바닷 바람과 흩뿌리는 비에 우비 없이 걷기 힘든 날이 대부분이다. 어느 해 1월 1일, 남편과 나는 바람이 일렁이는 그 곳으로 새해 맞이 여행을 떠났다. 그 해 우리의 맞이하는 콘월은 참으로 짖궂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로 바람은 거세게 몰아쳤고, 140도로 꺾인 따가운 빗방울은 얼굴에 무정히도 내리꽂혔다. 하룻밤 자고 일어난 새벽, 희뿌연 안개와 짠물 먹은 부서진 바람이 온통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그곳에서 우리는 거친 바다를 고집스레 감상하고 있다.


- 자기야 바다도 바람도 비도 다 좋은데... 이곳에 사는 건 참 많이 어려운 일처럼 느껴진다.

- 그치, 아 바람 너무 쎄다. 자연은 좋은데 너무 거칠다, 매일을 살기엔...

- 응 정말, 이런 자연을 어떻게 벗삼지? 빨리 가자, 바람 너무 쎄다.


거친 자연에 산책을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골프 클럽이 하나 있다. 자동차 몇 대가 방금 엔진을 끄고 주차한 듯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세 명의 남자가 튼튼한 우비를 입고, 골프치기를 준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날씨에, 이 바람에, 이 아침에?? 이게 가능하다고??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는 듯 눈빛을 주고 받았다. 그치, 맞다, 아, 그래 이게 영국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지.


오늘 우리가 제대로 보고 가는구나.






완벽하지 않아 미루는 일은 없다. 날씨가 좋지 않다는 핑계로 삶을 미루다보면, 이곳, 영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완벽에 집착했던 삶이 가장 큰 실수였음을 별스러운 날씨를 가진 영국에 가서야 비로소 배울 수 있었다. 완벽주의의 성향 때문에 준비를 위한 시간만 보내느라 시작도 못한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완벽한 때를 기다리느라 미뤘던 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미루는 일을 삶으로 삼을 뻔했다. 일단 주어진 것을 먼저 하고,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먼저하며, 일단 시작할 수 있는 행동을 해야 진짜 살아지는 것, 그것이 완벽하지 않은 매일을 사는 법이라는 걸 런던에 와서 옹골차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완벽하지 않은 것이 주는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 없을 땐 걸으며 런던 구석구석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고, 이사를 자주 해야 할 땐 동네 곳곳을 돌며 그 특색이 주는 개성을 느낄 수 있었으며, 생활비 마련을 위해 일하느라 바쁠 땐 일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다. 또 마음 줄 친구 없이 혼자 일 땐 고독을 마주한 시간에야 마침내 홀로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깜깜히 축축한 겨울에는 꽃을 꽂으며, 소소한 우아함을 알아갔다.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즐길 수 있는 순간을 숨은 그림 찾듯 하나씩 찾아가며 일상을 채웠다.






갑작스런 엄마의 암진단으로 계획도 없이 서울에 와서, 이렇게 고립의 시간을 보내는동안 런던의 완벽하지 않은 날을 즐기던 그 태도 덕을 톡톡히 보았다. 엄마와 손깍지끼고 걷는 순간을 추억할 수 있게 되고, 어려운 시간을 부모님과 오롯이 보내며, 두 분의 새로운 모습을 담아둘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싶은 마음도 들고, 그런 중에 매일 글을 써보겠다며 덤벼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더 좋은 조건과 더 좋은 삶, 더 좋은 시간은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 내게 주어진 완벽하지 않은 날 속에서 그것을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진짜 내 삶으로 남는다. 비 오는 회색 하늘이 매일이라고 오늘을 미루다보면 지금은 영영 만날 수 없게됨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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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아침 산책길 콘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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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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