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오월이었는데, 아빠 전화를 받고 허둥지둥 짐을 싸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떠났던 때가. 생전 처음 마주한 삐쩍 마른 몸의 엄마가 너무도 낯설어 어쩔 줄 몰라하던 순간이 어느덧 일 년 전이다. 엄마와 전화 통화를 마치고 문득 책상 위 달력을 바라본다. 수술 후 14차 항암 주사, 오늘을 기록하는 문구가 이렇게 적혀있다. 이제는 전화할 때마다 "어~ 딸!" 하는 목소리에 힘과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도 주사 맞는 횟수가 늘어가니 무던한 엄마도 꽤 자주 힘들다 표현하신다. 지난달에는 근육통이 심해 잠을 주무실 수 없다고 하셨다. 강한 진통제만큼은 복용하지 않겠다며 끝까지 참고 계셨다는데, 몇 일밤은 그거라도 넘겨야 긴 밤 잠을 주무실 수 있었단다. 언제나 멀리사는 딸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말씀하시니 엄마의 표현에 몇 곱절을 더해 알아듣는다.
지난 일 년이 지나는 동안 이런저런 변화는 분명 있었다. 엄마 몸 상태에 대한 시시콜콜한 대화가 매일 끊이지 않고, 드시는 음식은 어떤 것들인지 더 진지하게 궁금해하며, 운동 다니실 때 더 편하고 간편한 차림으로 다니실 방법은 없는지 확인하게 된다. 엄마도 변했다. 아프시기 전에는 무얼 사드리려 하면, 괜찮다고 너 필요한 거나 사 쓰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무엇이든 다 좋다고 하신다. 가끔은 필요한 것이 있으니 좀 주문을 해 달라 부탁을 하시기도 한다. 서울이 좋다던 분이 공기 좋은 곳으로 내려가 살아야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이제 본인 몸 건사하며, 아버지와 자연에서 살고 싶으시단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남은 평생 그렇고 싶다 하시니 변화는 분명 찾아왔다.
폭풍이 몰고 간 어수선한 모습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 평안하게 흐르는 변화도 느껴진다. 아빠는 이제 한시름 놓으셨는지 예전처럼 바깥 활동을 하기 시작하셨고, 런던으로 돌아온 난 일상의 고군분투에 한껏 젖어들었다. 매주 주말이면 무리해서라도 엄마 집을 찾던 동생네도 이제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껏 찾아뵙는다고 한다. 모녀의 수다도 다시 돌아왔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지난했던 그 여름을 이제야 슬슬 내어 놓으신다. "얘,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렇게 수월하게 넘어간 듯싶다. 수술도, 병원 생활도 그렇게 힘들게만 기억되지는 않는 걸 보면, 참 이상하지...", "아니 엄마, 옆 사람들은 고됐어~ 지금이야 엄마가 이렇게 잘 추스르고 회복하셨으니 지난 일처럼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징그럽게 비도 많던 그 여름을 어찌 잊겠어." "그래도 얘, 그렇게 지나간 게 얼마나 다행이니~"
아침 식사 후 등산, 점심 식사 후 산책 그리고 저녁 식사 후 다시 산책, 반복적 일과를 매일 빠지지 않고 하고 계신 엄마다. 두어 달 동안 세 끼 식사 후 30분-1시간 등산과 산책을 함께 하고는 난 5kg 정도 빠졌는데, 엄마는 되려 앙상한 뼈에 살이 붙어 몸무게가 늘었다고 하신다. 사이사이 남는 시간에는 식사 준비를 하시고, 마트에도 다니시며 먹거리에 더 집중하시고, 병원 가야 하는 날이면 이쁘게 김밥 도시락도 싸 다니신다.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분과 한강 다리를 건너 집까지 걸어오셨다고 한다. 수다하고, 쇼핑하며 외식도 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단다. 필사를 시작하시고는 컨디션이 좋은 날은 글씨가 마음껏 정도를 걷는데, 그렇지 않으면 후들후들 꼬불꼬불 지 맘대로라 속상하기도 하신단다.
매일 같은 날, 만나는 이도 딱히 없이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실까 궁금해 전화를 해보면 벌써 저녁 시간이라며, 시간이 어쩜 이리 빨리 흐르는지 모르겠다 푸념하신다. 또 항암 주사 맞으러 가야 한다며 이거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투정도 나누신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엄마가 행여 날아가 버릴까 두렵던 지난날이 꿈처럼 흐른다. 큰 일에 담대한 엄마, 무슨 일이 생겨도 다 헤쳐갈 길은 있으니 걱정 말라는 엄마의 시간은 이렇게 흐르고 있다. 물 좋고, 공기 좋고 햇살마저 좋은 그런 곳에서 수다 잔치나 실컷 열어봤으면 싶다. 엄마의 시간을 함께 걷고 싶은 마음이 부쩍 드는 걸 보니 멀리 사는 딸 이제 슬슬 한국행 비행기에 또 몸을 실을 때가 왔구나 한다. 혈색 좋아진 엄마 얼굴 다시 만나는 그날을 지금은 그저 맘 속으로나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