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일 년 넘게 날지 못하는 승무원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무급 휴가와 연봉 삭감이었으니... 이 변화의 바람에 몸을 실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까지 마음이 꽤나 어려웠다. 먹고살기 위한 진지한 궁리를 막상 시작하고 나니 지난 몇 년간 승무원 생활을 하며 마음속에 품었던 바람 하나가 떠올랐다. '이곳이 인생 마지막 직장이길... 그다음은 독립적인 주체가 되어 먹고살 수 있기를...' 본격적인 구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다음 단계인 독립된 주체가 될 준비는 되었는가?' 하는 질문에 먼저 답해야 했다.
대학 졸업 후 직장인이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내 의지대로 삶을 결정하고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행복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지며 살 수 있는 그 해방감과 성취감이 대단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의 행복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자유 의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감을 알아채기 시작했고, 빠듯한 점심시간, 갑갑하게 갇혀 있던 구두 속 발가락,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은 마음을 다독이던 어렵던 순간들... 계약된 시간에 갇혀버린 내 모습이 너무도 답답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그리다 보면, 시간적 자유를 얻을 수 있겠지 하는 꿈같은 요량으로 첫 직장을 나왔다.
시간은 넘쳐 났지만, 먹고사는 일만큼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없었다. 런던에서 공부하면서 다시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계약된 시간이 가져다준 안락한 일상이 절대 소소한 것이 아니었구나를 실감했다. 직장 생활의 굴레 속으로 다시 들어가자며 타협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고, 공간적인 얽매임이 덜 한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우연처럼 다가온 일이 승무원이었고 운 좋게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무실에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생활과 다르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기에 만족감은 높았다. 그런데 이것도 역시 유니폼 안에 갇혀 일하는 시간 동안만큼은 무엇이든 참고 견뎌야 하는 직장 생활임은 어쩔 수 없었다.
'과연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목표점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왜 그토록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것일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삶이 과연 존재할까?' 스무 살에나 가져봄직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이내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무엇을 읽어도, 어디를 보아도 완벽한 자유는 없어 보였다, 적어도 먹고사는 일에 한에서는. 구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인 주체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재정립해야 했다. 새로운 곳을 찾기 전 가장 큰 마음의 고비였다.
이력서를 고치고, 자기소개서를 써 내려가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러는 동안 지나 온 시간이 '실패'처럼 느껴졌다. '게을렀어. 너무 쉬운 길로만 걸으려 했어.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어. 진지하지 않았다고...' 이런 자책이 뒤 따랐고, 꽤 오랜 시간을 무거운 짓눌림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살자고 영국까지 날아와 그 많던 시간과 돈을 쏟아부은 것인가 하는 실망감이 가장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괜히 대청소를 시작했다. 미련 섞인 물건들이 하나씩 내다 버리며, 무겁던 마음도 함께 덜어내고 싶었다.
그러다 런던에 처음 왔을 무렵부터 써오던 일기장을 발견하곤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생기 가득한 문장들만 눈에 들어왔다. 어렵고 힘들어도 언제나 마무리는 씩씩했고, 스스로 다독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넘어져도 길을 찾아 나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지금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것도 용기라고 했던가. 현재 느끼고 있는 '실패'를 잘 담아내기로 했다. 그렇게 이력서를 수정하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반복적인 나날이 어느덧 한 달여가 되어간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그냥 흐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많은 경험을 했고, 그 안에서 배움과 성취의 순간들을 쌓아가며 기뻐하던 모습들이 새록새록 다가왔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 커다랗게 자리 잡은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있던 자리에서 열정을 가득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어디에 있던 마음 한편에 '이곳은 오래 있을 곳이 아니야'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고, 언제나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며 직장 생활을 했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느낀 실패라는 감정의 원인일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순간이 언젠가는 다가오겠지 하며 뜬구름을 밟으며 보냈던 시간이 보낸 응답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있는 곳, 내가 보내는 시간만이 진정한 삶이라는 걸 실패라는 쓴 맛과 함께 마음에 담아낸다.
막연한 것을 걷어 치우려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천천히 다시 시작해 본다. 삶이 끊임없이 던져주는 숙제를 먼저 해야겠다. 나를 받아주는 어느 곳이든 다시 시작하며, 실패가 가져다준 깨달음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지금을 사는 것, 현재 내가 있는 곳을 살고 다지며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모색해 볼 것이다. 자유 의지로 시간을 쓰고, 결정하는 삶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곳을 향할 수 있는지 결국에는 찾아낼 것이다.
실패를 벌거숭이 눈빛으로 마주하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럽다 느꼈다. 지금이 비록 그런 순간이라 해도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그것 또한 내가 걸어온 그리고 걸어가야 할 삶의 조각이기에. 의미 없는 순간은 없다고 한다. 다만 그 많은 인생의 조각들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것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만이 진정으로 배워 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세상을 기웃거리며, 다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내가 아니고 싶다. 깨어있는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현실에 발을 딛고, 눈은 앞을 바라보며, 힘차게 내딛는 발걸음으로 삶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