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저녁 식탁

뜻이 있던 엄마의 초대

by 김라희

여지없이 빠지지 않는 음식 이야기, 엄마는 오늘도 무엇을 먹었냐, 무엇을 먹을 예정이냐 물으신다. 런던이 아침이면, 서울에 계신 엄마는 저녁상을 그리고 계실 때다. 매일 나눠도 무궁무진한 그 음식 이야기, 혼자만 아는 레시피를 비밀스럽게 꺼내 놓듯, 대단한 작전이라도 짜는 듯 우린 그렇게 전화기 너머 수다를 주고 받는다. 저녁 식탁에 빠질 수 있었던 공식적인 첫 사유는 고등학교 야간 자율 학습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주말이나 방학 때면 저녁은 꼭 함께 하길 바라셨다. 도서관 위치도 걸어서 최대 15-20분 이내 여야만 했다. 엄마의 저녁 초대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저녁 먹을 시간인데 집에 안 오고 뭐하냐는 부모님의 전화는 이어졌고, 밖이 더 재미있는 철없던 대학생은 그 초대를 피하기 위한 핑계를 쥐어짜느라 매일 고민했다. 고집스럽게 저녁 시간을 함께하길 바라던 엄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제서야 그것을 헤아려본다.


며칠 전부터 곶감 빼먹듯 야곰 야곰 한 편씩 다시 시청 중인 드라마 한 편이 있다, 빨강머리 앤. 너무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라 나까지 합류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의 저녁 식탁이 오늘 글을 쓰게 했으니 어쩔 수 없다. 저녁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식탁에 앉기 전 농사일로 고단한 손을 씻는 매튜 아저씨, 그리고 마릴라를 도와 분주히 움직이는 앤. 음식을 정성스레 놓아두고 감사 기도를 올린 후 맞는 그들의 고즈넉한 식사 시간이 신성하게 느껴졌다. 다시 보는 영화나 드라마라도 볼 때마다 시선이 끌리는 지점은 매 번 다르다. 이번에는 그 저녁 식탁에 마음이 자꾸 갔다. 아마도 며칠 전 매일 식단 짜는게 이제 너무 귀찮다던 엄마의 투정 섞인 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선 반찬 없으면 밥 먹기 싫다는 딸, 국이 있어야 제대로 된 상차림이라는 아버지, 고기반찬, 소시지만 찾는 남동생 가지각색 식구들 입맛에 맞추느라 엄마 취향은 뒤로 밀리기 십상이었다. 이제야, 그것도 엄마가 아프고 나서야 식단은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는데, 그게 귀찮다고 하시니 멀리 사는 딸 마음을 어쩜 좋을까. 지난주에는 자리 잡고 앉아 엄마의 저녁 식탁을 떠올리며, 국/찌개류, 반찬류, 메인 메뉴, 별식이 적힌 표를 작성해 보내 드렸다. 지금껏 했을 "내일 뭐 먹지"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고픈 딸의 별 수 없는 해결책이다. '집밥 달인'에게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는 빠져나올 궁리만하던 그 식탁을 다시 들여다 본다.


엄마의 저녁 밥상은 소박하고, 정갈한 모습이다. 각자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묻어난 저녁 식탁은 분주했고, 그 자리를 채운 우리의 이야기는 별 일 아닌 사건들로 가득했다. 이 모든게 끝나고 나면, 하루를 제대로 잘 마친 듯한 작은 만족감이 밀려온다. 혹 언짢은 일이라도 있어 일그러진 얼굴로 밥상머리에 앉은 누구라도 있으면, "밥 먹겠다고 숟가락 든 거 보니 그거 별일 아닌 거야. 체하지 않게 천천히 들어."라며 덤덤한 듯 건네는 엄마의 야속한 위로도 들린다. 그렇게 저녁 한 끼에 풀어진 쉬운 마음안고, 뒤척임없이 잠자리에 드는 사춘기 소녀도 보인다.


식사를 차려내는게 품이 많이 드는 일이란 걸 이제야 안다. 혼자 살아보고, 가족을 이뤄보니 그 정성이 대단하고 귀하다는 걸 지금에야 느낀다. 왁자지껄 재미있는 저녁 시간, 눈치없이 울리던 핸드폰 진동 소리가 귀찮기만 하던 시절을 지나 오늘에 닿아보니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저녁 한 끼 먹으며 마무리 할 수 있는 오늘이라면,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괜찮은 거다. 그렇게 힘을 얻어 내일을 시작하면 그만이다. 가족들의 입맛을 감싸 안은 엄마의 소박한 저녁 식탁, 고집스러운 초대에 담긴 그 뜻을 이제야 만난다. 그리고 짝꿍과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까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새삼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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