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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서유 Oct 02. 2024

어느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아주 개인적인 회고


딱히 건네질 일이 없어 먼지만 쌓인 명함 한 묶음.

별색에 음각을 넣어서 정성스럽게 새긴 회사 로고를 뒤집어보면 네모 반듯한 명함 한편에는 나의 이름과 역할이 함께 쓰여있다.


박서유
Product Designer


누군가에게 내 직업을 말할 때면 종종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을 마주하게 된다. 한때는 열정적으로 “서비스 기획, 구조 설계, 그리고 화면 디자인까지 전 과정을 책임진다”라고 설명하곤 했다. 상대가 관심 없어도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이제는 그저 “앱 같은 거 만들어요~”라며 간단히 넘기지만, 그만큼 나는 이 직업에 애정과 자부심이 있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의 길은 꽤 보람 있었다. 나는 UI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기획과 전략에 욕심이 많았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전환하고 나서는 계획부터 실행까지 모두 내가 해내는 일이라는 점에 뿌듯함을 느꼈다. 열심히 일한 만큼 크고 작은 인정도 받았고, 그 인정이 원동력이 되어 더 열심히 일하게 되는 선순환을 만들어갔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워커홀릭'이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어딘가 조금씩 지쳐가는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30대 중반이 되고, 일에 익숙해질수록, 처음의 보람은 점차 부담으로 바뀌어갔다.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은 점점 모든 것을 해내야만 한다는 압박감으로 변해갔다.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부터 구조 설계, 제품의 정책 수립과 데이터 구조 논의, 디테일한 시각적 요소까지. 내가 손대지 않은 부분이 없었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1인분 한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더 많은 일들을 해내야 했다.


프로덕트 디자이너라는 이름 아래에 회색 지대에 있던 업무가 나에게 하나둘씩 붙기 시작한다.
QA 업무를 챙기고, 운영 이슈를 처리하고, 제품 히스토리까지 피그마에 체계적으로 정리해놔야 한다. 틈틈이 데이터를 들여다보며 인사이트를 얻고 개선점을 제시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다. 숨을 헐떡이며 이 모든 것들을 일정 안에 욱여넣고 나서야 겨우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대우나 존중을 받고 있는가?를 자문해 봤을 때.. 확신이 서지 않는다. 개발이나 PM에 비해 낮은 연봉 밴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나의 전문성이 종종 개인적 호불호에 의해 무시당하는 순간들은 나를 견디기 힘들게 한다. 


최근에는 연관 부서에서 '왜 글씨를 빨갛게 바꿔주지 않냐'며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그들에겐 무조건 잘 보이는 것이 미덕이었으며 화면의 전체적인 밸런스라거나, 에러 컬러와의 혼동 같은 말은 무의미했다. 화가 난 동료들 앞에 이것을 계속 거절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고집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수락했다.  열심히 설득하거나 다른 우회 방법을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과연 나는 지친 걸까? 아니면 단순히 모든 직군이 겪는 애로사항을 너무 크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흔한 자기 연민인 걸까? 이런 생각들이 종종 나를 사로잡는다. 게다가 내 경력이 그렇게 깊거나 폭넓지 않다는 사실도 스스로를 더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더 많은 경력을 쌓고 싶냐, 하면 이제는 망설여진다. 

링크드인에서 종종 마주치는 ‘디자이너의 성장’이라는 말이 이제는 공허하게 들리기만 한다.


흔한 푸념일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이런 고민 역시 업계의 한 단면일 수 있다는 이유다. 그저 어느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회고일 뿐이지만..  나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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