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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Oct 09. 2019

현지인이 그려준 보물지도

리스본에서 만난 따스한 우연


"액자 구조"란 것이 있다. 문학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서술방식 중 하나인데 말 그대로 '이야기 속 이야기'다. 여행에도 가끔 이런 구조가 등장한다. 주로 계획에 없던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때다. 여행을 가서 여권을 잃어버리거나, 현지인에게 초대받거나, 버스/기차 등을 잘못 타 엉뚱한 곳으로 가거나, 유명인을 만나는 순간 여행 속 또 다른 작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나는 4년 전 리스본에서 가장 따스한 여행 속 액자 구조를 경험했다. 포르투갈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이 곳에서 도착 첫째 날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를 구경하고 리스본 대성당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전망대에서 대성당까지 걸어서 약 5분이면 갈 수 있다.



체력과 시간만 허락해준다면 버스나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보다는 걸어서 이동하는 걸 선호한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마치 속성 족집게 강사처럼 도시의 전체적인 모습은 빠르게 요약해서 보여주지만 소소한 일상을 친절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마치 이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중요한 건 국영수)


걸어서 이동하면 도시 곳곳의 소소한 모습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을 수 있어서 좋다. 저녁 햇살이 따스하게 마을에 내려앉는 모습, 담소를 나누는 이웃들, 가방을 들고 바삐 어딘가로 향하는 행인 등 일상의 자연스러운 풍경을 여행자의 혹은 현지인의 시선으로 바꿔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버스를 타고 빠르게 지나치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대성당에 가까워지기 전 인상적인 식자재 가게? 보여 잠시 사진에 담았다. 벽면 한편에 안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유리창으로 된 냉동고를 만들어 놓았다. 마치 '우리 가게는 신선한 재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붉은 고기를 구경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그런데 아무 의미 없이 외벽만 지나가며 사진 한 장 찍은 가게인데 며칠 뒤 우연으로 가장한 따스한 선물을 내게 줄 줄 꿈에도 몰랐다. 역시 사람 앞 일 아무도 몰라.



대성당 구경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간다. 오를 땐 보이지 않던(정육점은 잘만 보더니..) 왼편으로 뻗은 좁은 골목길엔 아기자기한 디자인 샵들이 있었다. 그중 괜찮아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리스본의 디자인을 몸소 체험한 뒤, 구경만 잔뜩 하고 구입하는 물건도 없이 염치도 없이 가게 주인에게 근처 맛집을 물어봤다.


그 가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물건.. 사 둘걸 그랬다


웬만하면 여행 가기 전 (실패를 줄이기 위해) 유명한 맛집은 미리 찾아보고 가는 편인데 이 때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냥 현지인이 추천하는 맛집을 가 보고 싶었다. 뭔가 자유로운 여행자의 로망 중 하나 아닐까? 현지인이 추천하는 맛집.


오래 구경하고 구입하나 하지 않은 나에게 가게 주인은 싱긋 웃으며 주저 없이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킨다. 바로 옆에 철판 위에 고기를 직접 구워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있으니 가보라고.


레스토랑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니 본인도 몇 번 가보긴 했으나 (왜인진 모르겠으나) 이름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찾아가면 되나요?라고 되물으니 바로 옆에 유리창으로 된 고기 진열 창고가 있는 가게라고 대답해준다.


어?


대성당에 도착하기 전 신기해서 사진을 찍었던 그 가게 아닌가? 정육점이 아니라 식당이었구나? 거기가 바로 근처 현지인이 추천하는 맛집이라고? 결론부터 얘기하면 유럽 여행에서 가본 음식점 중 최고의 경험을 선사해준 곳이 되었다. 이름은 Restaurante 'Alpendre'



한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거대한 간판이나 경망스럽게 온몸 율동을 하는 바람 풍선 등은 대부분의 유럽식당에서 볼 수 없다. 알아볼 듯 말 듯한 풍경으로 행인들을 현혹한다. 들어오세요 라고 현혹하는 게 아니라 음식점인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보호색을 입고 포식자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정도다.


겉모습보단 본질에 충실한 모습이랄까. 굳이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않아도 '올 테면 와라. 갈 테면 가라. 우린 맛집이다' 그러니 대성당을 향해 지나가며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식당인 줄도 모르고 지나갔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본다.



예사롭지 않다. 전체적으로 낡은 티가 나는 나무로 된 바닥과 의자. 굉장히 따스하고 정감이 간다. 전체적으로 고풍스럽기까지 하다. 클래식한 천장 등과 타원을 그리며 동글게 자리 잡은 천장. 주방 벽 위에 기타 하나가 매달려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식사시간을 한참 지난 뒤 찾아간 덕분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점원들도 테이블에 앉아 쉬는 중


테이블 세팅은 평범하다. 물 잔 두 개가 엎어져 있고, 소금과 후추통, 접시 포크 나이프 등이 있다. 내가 앉은 이 자리에서 문 밖으로 지나가는 예쁜 트램들을 볼 수 있다. 소음도 시끄럽지 않고 보기에도 예쁘다. 고요한 음식점 안에 적당히 활기찬 일상의 소음이 들어온다.



먼저 맥주를 주문했다. 굉장히 독특한 잔에 나왔다. 마치 바이킹이 들고 마실 것만 같은 디자인. 나는 주방용품, 그중에서도 예쁜 (맥주) 잔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데 이 잔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에 내 취향을 그대로 꿰뚫어버렸다.


한눈에 이 맥주잔에 푹 빠져버렸다. 너무나도 내가 찾던 맥주잔 아닌가?! 저 투박함 하며 보냉효과도 괜찮아 보이고 너무나도 맘에 들어 미칠 것만 같았다. 정말 예뻐서 계속 사진 찍고 만지작거리고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나한테 팔라고 하면 팔까?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일단 진정하고 나오는 음식을 구경해보자.



비닐에 포장되어 나온 식전 빵. 포르투갈에서 먹은 식전 빵들은 하나같이 맛있었다. 웬만큼 유명한 빵집에서 먹었던 빵들보다 훨씬 더 맛있다. 그리고 뒤 이어 나온..시뻘겋고 윤기가 좔좔 흐르고 적당히 소금으로 간을 해둔 야들야들 부들부들한 고기!!


돌판이 준비되었다. 포크로 조심스레 야들야들한 고기의 속살을 꿰뚫고 행여나 바닥에 닿을까 손목에 힘을 뽷 주고 '힘내 생활 근육'을 외치며 고기를 높이 들어 뜨겁게 달궈져 보일 듯 말듯한 김을 내뿜은 철판 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를 들려줄 수 없어서 너무나도 안타깝다. 고기는 순식간에 먹음직스럽게 익는다. 사실 리스본엔 철판 스테이크로 유명한 집이 따로 있다. 한국인에게 매우 유명하여 가면 한국말이 꼭 한 번은 들린다는 '카방 카스'다. 내 입맛엔 여기가 더 괜찮은 것 같다. 단지 거긴 유명할 뿐이고 여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곳.


다시 정신 차리고 컵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맛있는 고기에 정신을 잃으면서도 한 편으론 저 맥주잔이 너무 맘에 들어 '이거 나한테 팔라고 할까?'라는 생각까지 했다. 정신 차려, 여행자의 체면? 이 있지. 아니야.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인생 맥주잔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체면과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는 결국 점원에게 물어본다. '이 맥주잔 어디서 구한 거야?'  차마 돈을 주고 이 잔을 사겠다!라고는 못하겠고, 점원이 이걸 어디서 샀는지 알긴 알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이었다.


가게에 들어와서 서빙을 할 때까지 줄곧 나를 친절과 익살스러운 미소로 맞이하던 점원은 급작&당황스러운 내 질문에 표정이 잠시 굳더니 허공을 응시한다. '역시, 모르는 건가..'라고 생각할 즈음 나에게 '잠시만'이라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카운터로 황급히 뛰어간다. 그리고 볼펜을 챙겨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종이타월 재질로 된 테이블보에 슥삭슥삭 무언가를 그린다. 다시 익살스러운 표정을 되찾은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보를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엔 영화나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보물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하.. 이 친절한 사람. 여행을 꽤나 다녀봤지만 현지인으로부터 이런 보물지도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점원은 그 맥주잔을 피게이라 광장 근처에 있는 주방용품점 'BRAZ&BRAZ'에서 샀다고 한다. 나는 너무 고마워 감사를 외쳤고 그는 하이파이브 및 악수를 청했다.


점원도 내심 뿌듯했는지 들썩이는 몸짓으로 카운터로 되돌아간다. 계산을 마치고 종이타월 같은 저 식탁보를 뜯어서 정말 보물지도인 냥 리스본을 떠나기 전까지 소중히 간직했다. (그리고 저 종이는 여전히 집에 소장 중이다)


유쾌한 점원은 가게를 떠나는 나에게 익살스러운 표정과 V를 그려준다


식사를 마치고 보물지도를 챙겨 가게를 떠나며 전경을 담아본다. 그러자 우리 테이블을 담당했던 점원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우릴 바라본다. 이 가게가 인상적이었던 건 맛있던 고기도 한몫을 했고, 인생 아이템 중 하나였던 저그저그 맥주잔도 한몫을 했지만 무엇보다도 서빙하는 내내 위트 넘치고 재밌던 점원이다.


낯선 곳에 가면 누군가 그리고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 진다. 내가 익숙한 것은 있나? 내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있나? 모든 것이 다 처음인 곳에선 작은 익숙함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런 익숙함마저 없다면 나에게 베푸는 낯선 이의 작은 친절은 너무나도 크게 다가온다. 그런 기억은 평생 남을 수 있다.



다음날 리스본을 떠나기 전에 점원이 그려준 보물지도 하나 들고 직접 그곳을 찾으러 갔다. 갈기갈기 찢었지만 소중하게 테이블 보를 들고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마냥, 인디아나 존스가 된 마냥 리스본 거리를 정글이라도 된 마냥 헤집고 다니며 잔뜩 흥분하고 긴장한 채 돌아다녔다.


진짜 제대로 그려준 걸까? 반신반의하며 찾아간 지도 속 그 거리에는 정말로 BRAZ&BRAZ가 있었다. (구글 지도보다 정확) BRAZ&BRAZ는 나중에 알고 보니 나름 홈페이지도 있는 괜찮은 주방용품 전문 도매 가게였다.



보자마자 반해버린 맥주잔을 실제로 구입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부풀어 나는 가게 여기저기를 뒤지고 다녔다. 사고 싶었던 맥주잔 말고도 너무나도 예쁜 것들이 많았다. 생각 같아선 전부 다 데려가고 싶었는데 캐리어가 공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짜잔~바로 이것이 음식점에서 반했던 바로 그 맥주잔. 이게 정말 존재하다니!! 만약 이게 없었더라면 난 다시 가게로 돌아가 가게 주인에게 중고로라도 팔아달라고 애원해볼 참이었다. 나는 6잔이나 사버렸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르니.



맥주잔 외에도 값싸고 괜찮은 것들이 많았다. 리스본에서 시간이 좀 남는 분들은 여기 방문해서 살림살이 좀 장만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쁜 마음에 다시금 광장으로 돌아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연히 지나간 가게, 우연이 들른 디자인 샵, 우연이 물어본 맛집과 우연이 돌아온 대답, 우연이 마주친 인생 맥주잔과 아님 말지 식으로 물어본 맥주잔의 구입처, 기대치 못한 보물지도와 실제로 존재한 보물.


여행은 예기치 못한 기대치 못한 상황 속에서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보다.



photos&words by la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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