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ainy Oct 05. 2019

파리 북역은 정말 무서웠다

우리가 여행을 가는 이유?

정말 좋으면 그럴만한 별 이유는 없다


정말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명쾌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 음식은 왜 좋아해? 그 사람은 왜 좋아해? 그 여행지는 왜 좋아해?


'글쎄.. 그냥, 좋아서?'


나는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온몸으로 새로움을 체험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치고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처음 해외여행을 떠났다. 뒤늦게 눈을 떴다고 해야 할까.


10년 전 봄, 약 40일 간 유럽여행을 떠났다. 첫 해외여행이었지만 다소 긴 일정과 난이도였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이라 직장인이 되면  다시는 긴 여행을 떠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길게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두고두고 잘 한 선택이 되었다. 사람이 경험을 통해 얼마나 달라지는직접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히 첫 도착지였던 파리의 북역에서 겪은 은 일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경험과 감정을 짧게 공유해본다.


귀국 후 로또라도 사야 하는 상황


첫 해외여행이라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공항으로 향했다. 약 한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항은 엄청나게 크고 복잡했고, 인터넷과 책으로 예습했지만 출국 절차는 여행 초보인 내게 매우 복잡하기만 했다. 


비수기 평일에 탄 덕분인지 공항버스와 마찬가지로 비행기 안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좌석 한 열을 전부 혼자 쓸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이런 행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은 매우 지루했다. 좁은 좌석에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앞에 있는 모니터로 영화를 보다가 잠을 청하기도 했다가 멍하니 있기도 했다가 별 짓을 다했지만 시간은 무척이나 더디게 흘러갔다. 이후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 리스트에 '비행기 안에서 바로 잠드는 사람'이 추가되었다.


그렇게 비행기 안에서 점점 외국인이 되어가는 순간 비행기는 파리 상공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다행히 첫 착륙은 굉장히 매끄러웠고 주변에 있는 모두와 '살아서 내렸네요'라는 안도의 눈빛을 교환한 뒤 비행기에서 가볍게 내렸다. 


입국장은 한산했고, 파리에 왜 왔냐는 직원의 간단한 물음에 '놀러 왔어'라고 대답하자 'ㅇㅇ'이라고 대답하며 여권에 입국 장을 쾅 찍어주었다. 외국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도장인 셈이다.


곧 수화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의 행렬을 뒤쫓았고 나올 듯 안 나올 듯 '왠지 내 만 안 나오는 것 같아'라는 조바심을 느낄 때 즘 컨베이어 벨트가 내 캐리어를 뱉어낸다.


처음 타 본 RER. 낡고 오래되었지만 정겨웠다


입국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친 뒤 드디어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한마디로 아수라장.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뒤섞여 공항 안을 가득 메웠다. 


수화물을 찾고 잠시 공항 의자에 앉아 파리 북역(Gare Du Nord)으로 갈 수 있는 경로를 찾기 시작했다. 파리 북역에서 나의 첫 여행지인 벨기에로 가는 고속열차를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 CDG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유레일 패스 소지자라면 RER-B line을 이용하는 게 편하다. 파리 북역까지 갈 수 있는 RER티켓을 무료로 주기 때문이다. 


CDG에서 RER을 타고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처음 타 본 RER 안은 사람도 없이 굉장히 조용했다. 노선표를 보고 또 보며 나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제대로 가고 있는 거야' 지금과 달리 10년 전만 해도 스마트 폰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다. 


잔뜩 긴장하며 열차 노선도에 찍힌 역을 하나하나 세다 보니 이윽고 어눌한 발음으로 gare du nord(파리 북역)를 말하는 방송이 들렸고 저녁 7시쯤 멈춘 기차에서 내려 플랫폼에 발을 내딛고 주위를 둘러보니 비로소 '정말 외국이네, 여기서는 내가 외국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 본 파리 북역의 모습은..



아.. 사진이 잘못 올라갔다.



기차역은 거대했으며 어둑어둑하고 낡고 지저분했다.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은 전부 나보다 덩치가 컸다. 태어나서 다른 나라 사람을 이렇게나 많이 본 경험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조금 과장을 하면 정말 나 홀로 다른 인종인 듯한 느낌?


공항까지는 무언가 나를 지켜주는 느낌이 들었는데 파리 시내에 도착하는 순간 야생에 홀로 남겨진 어린 사슴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주변을 서성이고 어슬렁거리고 스쳐 지나가는 모두가 나를 잡아먹을 포식자로 보였다. 덩치 큰 남자들이 지나갈 땐 괜스레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걸음을 재촉하고 주변을 경계하며 걸었다.


파리 북역을 빠져나와 유럽의 하늘을 처음 마주했다. 고풍스러운 건물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해의 흔적이 푸른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하늘 한가운데를 붉게 물들였다. 너무나 예뻐서 무서움과 배고픔마저 몽땅 잊어버린 채 한참을 바라봤다.


기억 속에 콱 박혀버린 아름다운 장면


새삼 유럽의 하늘은 언제 봐도 예쁘다. 그 아래 담긴 풍경도 한몫했을 것이다. 한국에서 는 밋밋한 건물이 아니라 영화에서 보던 고풍스럽고 덩치 큰 건물 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은 네온사인을 밝힌 레스토랑. 한동안 나에게 유럽이라는 이미지의 전형이 된 모습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첫 해외여행 도전인데 안전하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자꾸 보다 보니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지만 이 때는 정말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원래, 처음은 다 그런 것 아닌가


하늘은 이내 밤의 기운으로 뒤덮였고 문득 내 처지를 다시 깨닫고는 먹을 곳을 찾았다. 긴장하고 뻣뻣한 몸을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둘러보니 낯익은 곳이 눈에 보였다. SUBWAY. 


나에게 인생 샌드위치를 만들어준 파리 북역 근처 서브웨이. (넌 나에게 X을 줬어)


한국에서 한 번도 가본적이 없었지만 굉장히 반가웠다. 마치 친하지 않았던 사람을 낯선 외국에서 만났을 때의 기분이랄까. 하지만 나는 주문하는 법을 몰랐고 종업원은 영어를 할 줄 몰랐다. 


나에게 주문을 하는 방법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음을 직감한 점원은 체념한 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이것저것 다 넣어버린 채 샌드위치를 건넸다. 한 입 베어 무니, 언어소통의 부재가 이렇게나 괴상한 먹거리를 만들 수 있는지 온 몸으로 알게 되었다. 


연이은 충격을 안겨준 인도의 어느 빵집. 미식의 나라라며? 미식의 나라라며!!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의 첫 끼니가 괴상망측한 서브웨이였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탄식할 노릇이다. 불쌍한 10년 전의 나. 아무튼 서브웨이에서 괴작을 맛보고도 시간이 남아 북역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북역을 기준으로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이 있었는데 오른쪽 길은 뭔가 무서워 보여 가지 못했다. 그래서 안전해 보이는 왼쪽 길을 택해 조심히 걷기 시작했다. 


중간에 인도 음식점이 하나 있었는데 손님이 많아 보여서 서브웨이의 실패를 만회하고자 그곳에서 빵과 비슷한 것을 구입하고 다시 북역으로 돌아왔다. 


그 빵은 수 시간 뒤 벨기에로 향하는 탈레스에서 맛보았는데 서브웨이를 가볍게 뛰어넘는 폭탄이었다.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


너무나도 신기하고 낭만이었던 타임테이블. 차르륵 소리가 매력이다. 21:55분에 내가 탈 열차가 보인다


북역은 여전히 어둡고 무서웠으며  영화 언더월드에서 나올법한 사람들만 사람들만 지나다녔다. 괜스레 목을 움츠린 채 탈레스를 기다리며 챠륵챠륵 넘어가는 타임테이블을 보기도 하고, 안내판 같은 곳에서 현지인인 양 무언가를 읽어보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철저하게 낯선 환경에 떨어진 기분.


결국 밤 9시 50분이 되어 벨기에로 가는 탈리스에 올랐고 고요히 출발한 열차는 캄캄한 파리의 밤을 가로지르며 달린 끝에 정말 은근슬쩍 국경을 넘어 브뤼셀 미디 역에 정차했다. 그리고 약 40일간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긴 여정의 시작이자 여행 만렙 길의 시작인 벨기에로 향하는 탈리스 열차 안


이후 벨기에 - 네덜란드 - 독일 - 체코 - 오스트리아 - 이탈리아 - 스위스 -스페인을 거쳐 정확히 한 달이 지난 뒤 다시 파리 북역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남은 5일을 보낸 뒤 영국 런던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유럽 여행의 시작이었던 파리 북역을 한 달 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예전의 그 어둡고 무서웠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약간 긴장한 채 기차역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때


'여기, 한 달 전 그 북역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하고 거대한 기차역은 밝고 유쾌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 안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인상 좋고 기분 좋아 보였다. 영화 언더월드가 아니라 미드 프렌즈에서나 볼법한 친근한 캐릭터들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제야 한 달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북역의 세세하고 소소한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런 게 있었나? 이런 게 있었다고? 이건 언제 여기 있었지?


너무나도 아름답고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파리 북역. 비단 도착 시각이 문제는 아니었다


너무 놀라 북역 밖으로 뛰쳐나와 한 달 전과 동일하게 역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잠깐만, 그 위험했던 길이 오른쪽이었나 왼쪽이었나? 찾을 수가 없어?!! 어느 길도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아!!' 한 달 전 들렀던 서브웨이와 인도 빵 가게도 스치듯 지나갔다(안녕 미식의 나라..) 그리고 북역 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다시 북역으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이 곳에 도대체 무슨 변화가 생긴 거지? 저녁이 아니라 낮에 와서 그런 건가? 런던으로 향하는 유로스타를 기다리며 별 생각을 다 하다 내린 결론은 바로 이거였다


북역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가 달라졌구나



약 한 달간 유럽을 누비며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경험을 했다. 그리고 한 달 전의 나와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유럽의 낯선 풍경도 덩치 크고 무섭게 생긴(것 같은 착각이 드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도 그 사이 익숙해진 것이다.(무섭지 않아요) 내 인생에서 이런 드라마틱한 변화를 기분을 감정을 느낀 순간은 이때가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무서웠던 북역 주변길도 여유롭고 거침없이 걸었다. 이렇게 좋은 길을..
왼쪽은 09년 5월 7일 오른쪽은 09년 6월 9일 같은 장소지만 한 달 전 풍경과 한 달 후 풍경이 다르다


경험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 온 몸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나이가 어릴수록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았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진 탓에 끝까지 읽은 분이 계실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도 슬슬 걱정이 되지만 어디선가 읽었던 감명 깊은 문구로 마무리를 대신한다.


"나는 책을 읽었고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words&photos by lainy


이전 09화 a cup of coffe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