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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iny Oct 03. 2019

a cup of coffee

유럽의 커피는 무엇이 달랐나

달고 쓰다


Scene #1

어렸을 땐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다. 10여 년 전 신입사원 시절 비슷한 지역에 살고 있는 동기끼리 모여 약 반년 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작업을 하는데 커피숍만큼 좋은 공간은 없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조원들은 전부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하지만 나는 카페모카를 주문했다. 그것도 휘핑크림 가득 얹어서. 이 때 까지 아메리카노는 굉장히 쓴 한약과 같은 물이었다. 몇 개월 간 다양한 커피숍에서 모임을 갖았지만 그 때 마다 계속 카페모카만 주문했다. 


그러다 어느 날 들어간 커피숍에서 여전히 앞뒤 안재고 카페모카를 주문하려는데 A4 용지에 대충 커피 종류별 칼로리를 적어놓은 게 그날따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거기엔



카페모카 530kcal


이 때 부터였다. 카페모카를 끊고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된 것이


Scene #2

어머니는 커피를 즐겨 드셨다. 동*식품에서 나온 커피믹스를 드신 게 아니라 정말 클래식하게 커피, 프림, 설탕을 따로 담아두신 채 어머니만의 황금 조합에 따라 따순 물에 각각의 가루를 섞어 드셨다. 내가 유치원 때까진 이렇게 드셨다. 그 이후로는 동*식품에서 나온 믹스커피로 편하게 드셨다.


향에 민감한 나는 어머님께서 매번 커피를 타실 때마다 거실을 가득 채우는 그 향기가 너무 좋았다. 아직까지 경험이 일천한 나이었는지라 향이 좋은 것은 무조건 맛도 좋다고 생각해서 어머니 몰래 커피를 한 모금 마셔보았다.


7년 인생 통틀어 그렇게 입에 쓴 액체는 처음이었다. (이후 한약이란 걸 먹으면서 1위를 뺏겼지만) 커피를 마시고 으엑 퉥퉥 하는 나를 보시고 어머니는 크게 웃으셨다.


Scene #3

법원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내가 있던 사무실엔 어릴 적 어머님께서 이용하셨던 황금의 3중주 커피, 프림, 설탕이 둥그런 통에 담겨 있었다. 해당 팀에 배정받은 공익은 커피를 타는 법부터 배워야 했다.


나보다 한 달 일찍 입대(?)한 선배는 커피를 기가 막히게 탔다. 대중의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탈 줄 알았다. 대충 슬렁슬렁 타는데도 균형감 있는 커피가 완성됐다. 그 선배가 커피를 타는 순간만큼은 5성급 호텔의 수석 셰프의 아우라가 보였다.


세 달 더 일찍 입대한 선배는 마니아층이 있었다. 도대체 커피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진 모르겠지만 대다수의 입맛에 별로 였는데 하필 팀장님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맛이었다. 사회생활 만렙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정말 커피 타는데 소질이 없었다. 학창 시절 미분 적분 선형대수 그 복잡한 수학 공학 문제는 다 풀었지만 그 단순한 커피, 프림, 설탕의 2:2:2 조합은 절대 풀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분명 배운대로 탔는데 탈 때 마다 맛이 달라졌다. 이것이 바로 손 맛, 아니 스푼 맛이라는 건가?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게 있다. 나에겐 커피 타기가 그랬다. 



커피의 저변이 넓어졌음을 새삼 느낀다. 백화점 꼭대기에 있는 음식코너에 가면 나이 지긋하신 분들도 커피를 즐겨 드신다. 점심시간에 회사 밖을 나가면 눈에 밟히는 게 커피숍인데 곳곳마다 직장인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를 즐겨마셨지? 그야말로 배달의 민족이 아닌 커피의 민족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요즘은 커피를 꽤나 자주 그리고 즐겨 마신다. 커피 저변이 넓어져 예전처럼 풀리지 않는 난제와 싸우며 매번 달라지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도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회사 동료나 업무가 나에게 던지는 거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좋은 멘털 강화제로서 마시기도 하지만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길 줄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자주 접하다 보면 취향이란 게 생기고 상황에 따라 인생 커피를 만나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인생 커피 중 하나는 작년 겨울에 만났다. 회사 직원의 절반 이상이 참여하는 워크숍을 운영/진행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에 멘털 회복 차원에서 구급상자를 열어 HP와 MP를 충전하는 게임 속 주인공 마냥 눈에 보이는 GS편의점에 들러서 마신 커피였다.


나름 고급진 커피를 마시겠다고 아이러니하게도 편의점에 가서 제일 비싼 프리미엄 라인 커피를 마셨는데 그 향과 맛이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을 정도로 맛있어서 워크숍이고 뭐고 다 잊고 커피 맛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여행에서도 기대치 않은 상황에서 인생 커피를 만났다. 산들의 여왕 '리기산'을 갔을 때의 일이다. (https://brunch.co.kr/@lainydays/23) 루체른 중앙역 근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베기스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리기산까지 갈 수 있다. 아름다운 루체른 호수를 오랫동안 감상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경로다.


유람선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그냥 흔하디 흔한 유럽의 유람선. 호수를 구경하기 위해 난간 쪽에 있다가 앞으로도 한참을 운행한다는 얘기를 듣고 추운 겨울바람을 피해 잠시 객실 내로 들어왔다.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고 메뉴판이 있어서 펼쳐보았는데 간단한 음식을 주문할 수 있었다. 배불리 먹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냥 커피 한 잔만 가볍게 주문했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던 커피였고, 서버 역시 아무런 감흥 없이 건네었던 커피였다. 그런데 커피를 향해 고개를 내린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커피, 진짜다'


나는 따스한 커피 위에 살포시 올라가 두툼하게 커피의 따스함과 향을 보호해주는 크레마를 좋아한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크레마 역시 많다고 좋지 않고 적다고 나쁘지 않다. 루체른 호수를 가로지르는 유람선에서 서버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가져다준 커피는 정말 적당한 크레마를 품고 그것을 뚫고 올라온 커피 향이 오감을 자극하는 그런 커피였다.


바로 이 커피


커피잔의 작은 손잡이에 두툼한 손가락을 힘겹게 끼우고 잔이 좌우로 흔들려 커피가 쏟아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커피잔을 들어 입 근처에 가져가 본다. 향긋한 커피 향이 진하게 올라오며 잠시 잔을 멈춰 향을 음미한 뒤 입술을 따스한 커피잔에 대고 천천히 크레마와 그 안에 숨겨진 커피를 마신다.


아.. 이건 뭐 그냥 천국에 있는 기분이네


커피 한 잔 마시고 천국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면 매번 매 순간 마실 수 있다. 카페인에 중독된다 하여도. 정말이지 '맛있다'라는 표현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는 인생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해본다. 


소위 '분위기 발'이라는 게 있는데 유럽에 왔다는 사실이, 지금 아름다운 호수 유람선에 타고 있다는 사실이, 사실 아침을 먹지 못해 정오가 다 되어서 처음 섭취한 음식이라는 사실이 이 커피의 맛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올려준 것인가? 하고


하지만 두 번 세 번 커피를 마신 뒤 내린 결론은, 역시 이 커피는 정말 맛있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후로 유럽 여행 혹은 해외여행을 가서 많은 커피를 마셔보았지만 루체른 호수 유람선 선상에서 마신 이 커피보다 더 기억에 남는 커피는 없었다.


그래도 언젠가 이 커피의 기억을 덮어버릴 정도로 더 맛있는 커피를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다.



words&photos by la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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