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항쟁과 탱크맨을 기억하며
어른이 없는 놀이터에서 법이 되는 건 나이도, 말발도 아닌 덩치다. 힘이 가장 센 자가 다시 모든 주권을 누리게 되는 또 하나의 세상. 초등학교 2학년 때 내 남사친이었던 K, 남다른 정의감을 불태우던 그는 그 이치를 영 못 견뎌했다. 결국 어느 날 덩치를 앞세워 미끄럼틀 줄을 무시하고 간 C에게 항의하다 얻어맞을 위기에 처했다. 퍽-하고 누군가가 맞는 소리, 꺅-하고 놀라는 관중들의 소리를 타고 모래 위로 넘어진 건 의외로 그가 아닌 나였다. 좋아하던 K의 위기 앞에 나도 모르게 앞선 몸, 그를 대신해 밤탱이가 된 나의 눈퉁이. 그게 내 생에 처음으로 누군가를 막아서 본 기억이었다.
그 일 이후 나는 한동안 C를 피해 다녔다. 맞아 보니 주먹이 얼마나 아픈지 알게 됐고, C가 여차하면 때릴 녀석이란 걸 더 잘 알아서 그랬던 것 같다. 사람 하나도 이렇게 두려운데, 하물며 전날 저녁 내내 사람 여럿을 짓이겨댔던 탱크 앞은 어떠했으랴. 31년 전 여름, 천안문 앞엔 평화의 바리케이드가 섰다. 개혁개방으로 가속화되는 불평등과 점점 더 강해지는 비자유의 흐름을 시민들이 막아선 것이다. 그때 가장 힘이 셌던 중국 정부는 시민들이 지적한 문제를 들여다보기보다 무력을 써서라도 관성을, 본래의 권력을 지키길 택했다. 그러나 두려움이 무겁게 깔린 광장에서도 여전히 가장 강한 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탱크맨. 마르지 않은 핏자국을 디딘 채 어제의 희생을 잊지 않은 그가 있어, 두려움을 앞선 그 의연함이 남아 항쟁은 없던 일로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도망치지 않고, 멈춰 서게 만들었을까. 생사조차 불확실한 당사자의 전언을 듣긴 어려운 일이라, 그 질문에 답을 채우며 기억하는 일은 남은 우리들의 몫이 돼버렸다. 모두가 그의 모습에서 다 다른 각자의 의미를 찾아왔을 테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항쟁을 기리며 홍콩에서 열렸던 촛불집회 속에서 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국가보안법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와, 우리 이전의 세대들을 기억합니다. 이건 양심의 문제고, 더 나은 중국을 만들기 위한 문제입니다.” 그의 또래일 한 나이 든 참여자의 인터뷰에서 언뜻 탱크맨을 의연하게 만들었을 무언가가 보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안위 이상의 것들을 볼 줄 아는 눈을 갖고 있었다. 어제 스러져간 사람들을, 자라날 세대를, 나를 키우며 품고 있는 사회를 올바로 지키려는 마음이 담긴.
결국 우리로 누군가의, 무언가의 앞을 막아설 수 있게 만드는 건 내 옆의 사람들이다. 어떤 정의의 원칙보다도 앞서는, 내가 아는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들. 돌이켜보면 C 이후에도 나는 살면서 여러 번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아 설 기회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과거의 혹은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발을 떼게 한 건 내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닌 그들과 우리를 위할 때에야 비로소 어떤 것 앞에서도 몸이 굳지 않았다. 사회가 어려울수록 이웃됨을 넓혀야 하는 건, 어쩌면 알고 가까워지는 만큼 우리가 서로를 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위하기 시작할 때, 그 흐름이 다시 사회를 바꾸는 저력이 되어 탱크를 밀어내는 사람(Men)이 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