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조급함과 함께 걷는 법

하루를 살아낸다는 말이, 요즘은 내게 더 솔직하게 다가온다.

by 월화수 엔 Jane

이민 온 지 5년이 지난 지금,

언어는 익숙해졌지만 마음의 거리감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한국에 있을 때, 나의 삶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안정적인 직장, 익숙한 거리, 편안한 언어. 누군가에겐 평범했을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 나름의 안온함이 있었다.

그러던 내가 이민을 결심했다.

삶을 조금 더 깊이 느끼고 싶었고, 어쩌면 나 자신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싶었다.

처음 1년은 모든 것이 신기했고, 낯설었지만 그만큼 명확했다.

'살아낸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피부에 와닿았으니까.

2-3년차에는 숨 쉴 틈 없이 적응하기에 바빴다.

매일이 생존이었고, 작은 성취들이 큰 기쁨이 되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나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서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얼마 전, 마트 계산대에서 카드를 내밀다 무심코 직원의 말을 못 알아듣고 머뭇거렸다.

초기에는 이런 순간이 공포였지만, 이제는 일상의 작은 불편함으로 축소된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불쑥 스며든 생각— "5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건 언어나 문화의 장벽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물음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그 물음은 커졌다.

내 또래 한국 친구들은 지금쯤 자리를 잡고, 아파트를 사고, 은행 잔고를 쌓아가고 있을 텐데.

SNS에 올라오는 그들의 승진 소식, 휴가 사진들을 볼 때마다 묘한 시간 차이를 느낀다.

나는 지금 이 낯섦이 익숙해진 곳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는 걸까.

어디쯤 와 있는 걸까.

5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꿈꿨던 모습과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 이민 왔을 때의 조급함은 '적응'에 관한 것이었다.

언어를 빨리 익히고, 현지인처럼 보이고, 낯선 환경에 녹아들고 싶다는 열망.

5년이 지난 지금의 조급함은 다른 종류의 것이다.

'방향'에 관한 것.

이제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

몸은 침대에 있지만 마음은 자꾸만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그럴 때면 나는 나에게 조용히 묻는다.

"너는 왜 이곳에 왔었지?"

그래, 나는 안정을 떠났고 눈에 보이는 성취 대신 나 다운 삶을 선택하고 싶었지.

언어가 어색하고 사회적 지위는 흐릿해졌지만,

나는 지금 내 삶의 결을 다시 만져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값진 변화일지도 모른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이곳에서 형성된 새로운 나 사이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때로는 두 세계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 특별한 관점을 선물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아침마다 작은 루틴을 만든다.

일어나자마자 커피를 내리고, 창밖 하늘을 몇 분간 멍하니 바라본다.

처음에는 이 낯선 곳에서의 하루를 단단히 시작하기 위한 의식이었다면,

이제는 내 안의 균형을 잡는 시간이 되었다.

그 하루가 망가지더라도 그 시작만큼은 내가 만든다고 느끼고 싶어서.

가끔은 산책길에서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춘다.

5년 전에는 그저 풍경의 낯섦에 놀라워했던 길에서, 이제는 내 인생의 궤적을 되돌아본다.

그러다 바람이 코끝을 스치면, 그래도 여기에 살아 있다는 감각이 다시 돌아온다.



한국에 남았다면 아마 더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삶을,

어쩌면 더 풍요로운 물질적 성취를 이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었을 다양한 순간들과 깊은 자기 이해를 이곳에서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기쁨과 좌절, 외로움과 친밀함, 그리고 끝없는 성장의 순간들이 있었다.

불안은 여전히 있다. 조급함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정들의 결이 달라졌다.

이제 그것은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나는 이제 그것들과 싸우기보다는 함께 걷는 법을 배우고 있다.

때로는 불안이 추운 겨울처럼 나를 감싸기도 하고, 조급함이 폭풍처럼 나를 흔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날씨를 견디며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조급한 마음을 안은 채 천천히라도 내 걸음을 내딛는다.

그것이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이고,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빠르게 흘러간다.

누구나 무엇이든 이뤄내는 듯 보이고, 나는 종종 그 흐름에서 한참 뒤처진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안다. 내가 이곳에 있는,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의 인생을 따라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의 삶을 살아보기 위해서 였다는 걸.

5년 전의 첫발과 달리, 이제 나는 조금 더 복잡하지만 더 진실된 감정들과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조금씩 내가 찾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오늘도 조급한 마음과 함께 걷는 중이다.

작은 용기로, 작은 걸음으로, 그러나 분명한 나의 방향으로.



「덧붙이는 글 – 5년의 조각들을 지나며」

이 글은 이민 5년차의 시간을 돌아보며,
조급함과 불안, 그리고 작지만 단단한 변화를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익숙한 낯섦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이 걸음이,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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