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에게 심각한 행복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p.174)
1. 사랑은 시간을 뛰어넘는 것이다. 아주 짧은 순간에도 우리는 사랑에 취할 수 있고, 때론 평생을 못 잊는 사랑도 있음을 안다.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진정으로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느끼지 못하다가 그것들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진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가장 불행하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심각한 것이다.
행복의 추구는 중심적 목표로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그 실현이 아주 먼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암묵적 믿음이 뒤따른다. ... 왜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았을까? 어쩌면 현재를 즐기는 것은 불완전하고 위험스러울 정도로 덧없는 현실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pp177-178)
2. 어쩌면 우리는 현재를 잊고 살도록 그렇게 강요받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현재라는 순간은 아주 짧은, 아니 현재라고 인식하는 그 순간조차 과거로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미래 또는 과거가 더 우리에게 익숙해졌을 수도 있다. 과거와 미래에 끼어버린 현재는 즐길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느낀다. 과거는 언제나 후회의 대상이고 그리움의 원인이다. 미래는 소망의 존재이고 상상의 결론이다. 하지만 현재는 그것들을 위해 언제나 희생해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는 희생되어야만 한다. 과거를 잊기 위해서 현재는 희생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현재는 결국 똑같은 과거, 미래가 되어버린다. 그 결과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81)
3. 추구하던 목표가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겪고 있는 큰 공포일지도 모른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뒤로 차일피일 미루면서도 목표만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삶을 비춰주는 등대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등대는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의 목적지는 항구다. 미래는 우리의 등대일 뿐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진짜 목적지는 바로 현재라는 항구다.
통제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하여 얻은 행복, 이성적으로 노력해서 어떤 일들을 성취한 뒤에 찾아오는 행복은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내가 클로이와 함께 얻은 행복은 깊은 철학적 숙고 뒤에 나온 것도 아니고 개인적 성취의 결과도 아니었다. 단지 신의 기적적 개입에 의하여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귀중한 사람을 찾아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그런 행복은 위험했다. 자족적인 지속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p.184)
4. 사람은 인과를 이해하려고 한다. 무엇인가 현상이 벌어진다면 반드시 원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마치 무엇이든 해결하고 수리하고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과관계가 없는 일들이 더 많다. 상관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반드시 원인과 결과는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많은 것들이 그렇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단지 그것을 설명하려 하는 강박이 우리는 괴롭게 만든다. 이유를 찾으면 그것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연인들은 단지 그들의 행복의 실험에 수반되는 불확실성과 위험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랑의 이야기를 끝내버릴 수도 있다. (p.186)
5. 쉽게 이별을 말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에게 거저 주어진 불확실성의 행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 두려움에 직면하기 전에 차라리 그 위험을 직접 끝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상황을 통제한다는 욕구는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자학적인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너한테 약해 보여도 될 만큼 나를 사랑하니? 모두가 힘을 사랑한다. 하지만 너는 내 약한 것 때문에 나를 사랑하니? 이것이 진짜 시험이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p.192)
6. 우리는 강함을 사랑한다. 강함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쉽다. 그러나 약함을 사랑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나 자신의 약함을 알고 있는 나는 사랑받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사랑하는 것도 두려울 때가 있다. 그 시험에 마주한다면 나는 통과할 자신이 있는가.
증오는 사랑이라는 편지 안에 감추어진 글자들이며, 하나의 기초 위에 그 대립물과 함께 서 있다. (p.196)
7. 무엇이든 같은 이유로 사랑하고 증오할 수 있다.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그 점이 증오를 자아내기도 한다. 사랑과 증오는 같은 자리에서 생긴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도 증오하는 이유도 결국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