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훨씬 덜 즐거운]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가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p.201)
1. 답을 알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만, 질문 중에는 그 대답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의미가 사라지는 질문도 있다. 사랑에 대한 질문이 특히 그렇다. 사랑하는 사이에 사랑하냐는 질문의 의미는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태의 지속에 있다. 사랑이 끝난 사이에 "왜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그 대답을 알게 된다 해도 그것이 사랑하는 이유로 돌아가게 하지는 못한다. 결국 두 질문 모두 사랑을 지속하는 것도 사랑을 되돌리는 것도 할 수 없는 질문이다.
사랑은 첫눈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빠른 속도로 죽지는 않는다. (p.202)
2. 어쨌든 끝난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다만 그 유통기한은 양쪽이 다르며, 그로 인해 한쪽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미련이 없는 반면, 다른 한쪽은 그 유통기한이 다할 때까지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유통기한이라는 것은 명확하지도 않고, 사람마다 다르며, 사랑에 따라 달라서 그것을 겪는 사람은 고난의 연속이다. 시간이 약이지만 얼마큼의 시간을 투여해야 나을 수 있는지 본인 스스로도 모른다는 것이 괴롭다.
일단 한쪽이 관심을 잃기 시작하면, 다른 한쪽에서 그 과정을 막기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p.204)
3. 보통 연애가 끝나간다면, 관심을 잃어가는 쪽은 충실했던 쪽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며 오만하게 행동한 쪽은 떠나간 사랑을 질질 부여잡고 늘어지게 된다. 동시에 한때는 오만했던 자신이 이제는 상대를 오만하다며 매도한다.
이렇게 매도하며 원망하는 것도 상대방을 붙잡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만, 따지고 보면 끝나가는 사랑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어떤 일이 발생하면 사건 이전으로 되돌리기는 어려운 법이다.
(연애에서도) 정치적 테러리즘은 막다른 골목에 이른 상황에서 태어난다. 자신의 행동이 바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 - 오히려 상대를 더 멀어지게 하기 쉽다는 것 -을 알면서도[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나오는 것이다. (p.205)
4. 정치적 테러리즘이라 하면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연애에서도 정치적 테러리즘은 늘 존재한다. 어떤 일에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혹은 그것을 이루는 것보다 파괴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일 때, 정치적 테러리즘은 발생한다. 내가 갖지 못하는 것을 모두가 소유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렇다고 그 목표가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테러리스트 본인만 파괴할 뿐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 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p.213)
5. 낭만적 테러리스트라니 이런 모순된 존재가 가능한가. 테러리스트가 어떻게 낭만적일 수가 있을까. 낭만적인데 테러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이 역설된 존재는 사랑을 요구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사랑과는 관계가 없다. 원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할 때 그것은 테러가 된다.
나는 미래를 상상해보려고 했다. 삶의 한 시기가 잔인한 방식으로 끝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을 대체할 것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부재밖에 없었다. (p.217)
멍하게 이틀을 보냈다. 충격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 (p.219)
6. 헤어진 다음날, 경험해 본 적 있다면 그 블랙홀 같은 감정을 알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리고,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 감정은 누구나 경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몸은 큰 충격을 받으면 일시적 쇼크상태가 된다. 모든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마치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게 된다. 정신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나 알 정도로 정상적이지 못하다.
새로 채워진 것은 티가나지 않지만 부재한 것은 티가 난다. 그 부재한 것을 대신해 채울 어떤 것을 찾지 못한다면, 마치 풍선처럼 불어난 마음의 크기가 한순간에 일그러져 터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랑을 할 때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야. 느끼는 것과 하는 일이 모두 강렬해진다는 것이 중요한 거지. (p.220)
7. 사랑을 측정할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서로에 대한 지식의 양, 선물의 크기, 스킨십의 빈도, 함께한 시간... 하지만 그 무엇도 정확히 사랑을 측정할 수는 없다. 그저 표정과 삶의 활력으로 느낄 뿐이다. 무엇을 주고받았는지, 알고 있었는지, 얼마나 함께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p.223)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고 해서 내가 그녀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비록 내 사랑에 희생이 포함되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을 뿐이다. (p.224)
8. 순수하고 도덕적인 사랑은 대가 없이 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바라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이고 구속이 된다. 그렇다고 상대가 주는 것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도 도덕적이지 않다. 사랑이란 것은 결국 모두가 행복해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을 했다 해서 도덕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인 사랑은 설령 그것이 상대로부터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스스로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자신은 사랑과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대가를 이미 받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을 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 사람의 선택, 따라서 책임을 넘어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에서 퇴짜를 맞는 것은 ... 견디기 힘들다. 나에게 퇴짜를 놓은 사람이 한때는 사랑을 하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pp.227-228)
9.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그리고 그 기적을 맛보았던 사람은 기적이 부재한 현실을 견디기 어렵다. 원망할 곳도, 원망할 사람도 없기에 더욱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