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중독

by Lakoon

초3 조카와 집에서 쉬는 날이었다.


조카는 엄마에게 보고 싶은 영화를 봐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다. 단, 조건은 그날 해야 할 숙제를 다 끝내고 저녁 8시 전까지. 아이는 서둘러할 일을 다 끝내는 것 같더니 5시 반쯤이 되자 나에게 말했다.

"삼촌 이제 영화를 볼 거예요."

나는 조카가 숙제를 다했는지 확인했다. "그래. 이제 영화 보자!"


"그래서 영화 뭐 볼 거야?"

"아직 안정했어요. 찜해놓은 것들 중에서 볼 거예요."

그러더니 대충 봐도 30개 정도는 되는 목록 중에서 이리저리 고심하기 시작했다.


벌써 5분이 지나 10분이 흘렀다.

"보고 싶은 거 없어?" 조금씩 답답해지기 시작한 나였다.

"아니요.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왠지 익숙한 상황이다.


"삼촌이 도와줄까? 이거는 어때?"

"이거는 지난번에 봤어요." "그럼 저거는 어때?"

"저거는 재미없어요."그러면 이거는?"

"이거는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럼 저거는?"

"저거는 재미없어 보여요."


왠지 꿀밤을 쥐어박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는 어른이니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그러면 보고 싶은 3가지만 정해봐."

"3개는 너무 적어요. 5개 고르면 안 돼요?"

'음,, 자칫하면 이 녀석 페이스에 말려들겠는데..'라는 생각에 대충 대답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5개 골라보자. 고르고 나서 알려줘."


한참이 지나 조카는 나를 불렀다.

"그래 5개 골랐어?"

"네! 골랐어요."

"그러면 그중에서 다시 골라보자. 이 중에 네가 안 본 게 있어?"

"아니요 다 봤어요."


'아.. 말렸다...'

이녀석, 영화를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고르는 자체로 재미를 느끼는 것 아닐까.


이거는 어때? 저거는 어때를 반복해서 물으면, 이런저런 핑계가 돌아왔다. 5시 반부터 시작했던 영화고르기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결론나지 않고 있었다. 이제 약속했던 8시까지는 장편 하나를 보기에 빠듯하다는 걸 조카는 알까.

"이제 너 이것들은 못 봐. 짧은 것만 봐야 해."


결정장애.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흔한 질병인지. 그런데 결정장애에도 종류가 있다. 자신의 취향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일수도 있고,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카의 결정장애의 원인은 다른 것이다. 바로 '의미 중독'이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다. 보다 의미 있는 것을 선택하고자 하는 마음. 가성비, 가심비를 따지는 것도 의미 중독의 하나일 수가 있다. 무엇을 해야 잘했다고 생각이 들까. 어떤 것을 해야 시간을 잘 사용했다고 생각이 들까 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지나친 의미를 따지다 보면 아무것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의미라는 경험은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미리 알 수 있으면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결국 조카는 최소 7~8번은 봤다는 단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루해하기는 커녕 나에게 장면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대사를 외우는 게 무척이나 신나 보였다.


어쩌면 '의미 중독'에는 일단 아무거나 해보는 것이 처방전일 수도 있다.


ps. 우리는 영화의 결말을 보기 전에 약속했던 8시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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