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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koon Oct 12. 2024

미루기는 재밌다

1. 계획은 잘 세우는데 실행을 안 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가 그렇다. 그냥 쓰면 되는 건데, 그냥 하면 되는 건데 이 '그냥'이라는 게 그렇게 힘들 수가 없다. 뭐 대단한 글을 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군가 내 글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부담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하나의 취미인데, 자꾸 미루게 된다. 이쯤 되면 오히려 미루기를 즐기는 게 아닌가 싶다(미루기도 취미가 될 수도 있으려나). 무엇을 하기보다 미루는 그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은 미루기 좋은 매일이다.


  '내일 하지 뭐.' '아 뭔가 더 좋은 결과를 만드는 비법이 있을 거야‘라든가. 미루기할 때 으레 튀어나오는 생각이다. '소재는 함부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글쓰기 꿀팁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 이렇게 대충 써서 소비할 소재가 아니야. 이 내용은 좀 더 묵혀뒀다가 세상에 내놓자.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런 식으로 해야 할 일을 아껴두기도 한다. 그런데 또 이런 말 있지 않나. 아끼다 X 된다. 응? 그러고 보니 그래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미루고 아껴두는 소재는 결국 X글이 될 운명인가 보다.


2. 그런데 다 같은 미루기가 아니다. 같은 증상으로 보인다 해도 원인은 제각각일 수 있다. 내가 찾아낸 원인은 완벽주의 성향이다. 뭔가 더 좋은 타이밍이 나올 것 같고, 대단한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 같고, 내 실력이 더 발전할 것 같고. 아무튼 진짜 완벽한 때가 있을 거란 착각에 빠졌을 때 미루기는 아주 훌륭한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완벽주의는 가짜다. 또, 하나의 강력한 원인은 귀찮음이다. '오늘만 날인가,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하면서 '아 이따 하지 뭐' 이런 귀찮음에 잠식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루기라는 결과가 등장한다.


3. 고백하자면 나는 미루기라는 습관을 고칠 방법을 알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두 가지 원인에 따라 처방은 달라진다. 우선 완벽주의로 인해 튀어나오는 미루기에는 '대충'이라는 삶의 자세가 특효약이다. '그냥'이라고도 치환되는 '대충'이라는 태도는 일단 무엇이든 그까짓 거 대충 '시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완벽주의는 대충 해도 괜찮다는 삶의 태도에 치료가 된다. 가벼운 마음가짐은 스스로 만든 무거운 짐을 덜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대충이라도 할 일을 하게 만든다. 완벽하지만 실체가 없는 것보다 대충이라도 실체가 있는 것이 훨씬 낫다.  


 오히려 치료하기 어려운 쪽은 완벽주의보다 귀찮음이다. 이 귀찮음이라는 것을 이겨내고 뭐라도 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그렇다고 치료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접근법은 앞서 완벽주의에 대한 치료법과 다르다. 완벽주의는 '대충'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만, 귀찮음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마음가짐보다 일종의 상황과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것인데, 절대 깰 수 없는 약속을 만든다거나 (타의적인 상황), 귀찮음보다 더 강력한 지루함(자의적인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약속을 만드는 것은 일단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니 후자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보려고 한다.


4. 귀찮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세상에 많지 않다. 어쩔 때는 화장실 가는 것도 귀찮고, 물 마시러 가는 것조차 귀찮을 정도로 이 귀찮음은 강력하다. 그러면 이 귀찮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귀찮음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하게 만들면 된다. 사실 귀찮음 속에는 재미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그 순간 즐기고 있는 어떤 재미있는 것이 귀찮음이라는 단어로 포장돼 있는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해야 할 일보다 더 재미있는 선택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귀찮다는 핑계로 그 재미있는 것을 계속 즐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귀찮음을 이겨낼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다. 일단 귀찮음(=재미있는 것)을 쪼개 방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침대와 스마트폰은 강력한 귀찮음을 유혹하는 조합이다. (나도 고백하자면 침대에서 폰을 열어보는 것만으로 몇 시간은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조합을 떼어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게 포인트다. 침대와 폰 충전기를 가능한 한 아주 멀리 떨어뜨린다. 절대로 침대에서 폰을 충전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부담스럽지 않도록 슬쩍 침대 맡에 배치한다. 예를 들면 책이나 노트, 볼펜 같은 것을 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귀찮아 하염없이 뒹굴거린다 하더라도 결국 심심해서 뭐라도 쓰거나 읽거나 하게 된다.


 스스로를 지루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해야 할 일이 그나마 가장 재미있는 행위처럼 보인다. 귀찮음에는 지루함이 특효다.


5. 뭐 어쨌든 미루기와 완벽주의, 또는 귀찮음이 아주 끈끈하게 달라붙어 오늘도 빈둥거리는 삶이 되기 십상이다. 미루기를 이겨낼 처방전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약을 먹는 게 귀찮으면 그냥 또 미루는 게 일상이다. 시작이 반인데, 시작이 반이라서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뭔가 50%라는 것은 또 하나의 거대한 벽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결국 미루기를 열심히 하다가 쓰고 싶은 소재에 대한 글을 쓰는 대신 이런 잡글을 쓴다. 이런 결과라도 남겼으니 오늘은 미루기를 이겨낸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화를 하면서, 여하튼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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