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의 총 :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모든 요소가 반드시 이야기의 전개에 기여해야 한다는 뜻.
예를 들어 1장에서 총을 소개했다면 2장이나 3장에서는 반드시 총을 쏴야 하며, 만약 쏘지 않을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버려야 한다. 이는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하고, 모든 요소가 이야기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에서 '체호프의 총'이라는 개념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같은 창작물에서 우연히라도 한 번 드러난 소품은 어떻게든 스토리 전개에 사용된다는 문학 이론이다. 스쳐 지나가듯 등장한 어떤 실마리가 결말에 다다라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하는 반전 재미의 요소로 자주 쓰인다. 즉, 창작의 세계는 꼭 필요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선호하시나요?"라는 질문에 보통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미니멀리즘, 혹은 맥시멀리즘 중 하나다. 그런데 이 두 스타일은 극단에 있고, 실제로는 대부분이 두 스타일 사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에센셜리즘을 추구한다. 꼭 필요한 것만 유지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반드시 필요한 것만 남기기란 쉽지 않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에는 갖은 필기구와 책들, 노트들이 뒤섞여 있다. 나의 필요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고 우기고 싶지만, 도저히 누가 봐도 (널브러져 어질러진) 맥시멀리스트의 책상이다.
그래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필요한 것들이 필요한 위치에 있다.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는 위치에 그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필기구들, 할 일을 적는 노트, 새로 알게 되거나 기억해야 할 것들의 메모장, 병렬독서 중인 세 권의 책들, 틈새 공부 중인 외국어 책들까지 가짓수는 많지만 모두 나의 하루에 쓰이는 것들이다.
3. 책상보다 외출 가방 속이야말로 나의 에센셜리즘을 주장하기에 좋은 소재다. 가방 없이 외출할 때는 지갑과 에어팟, 그리고 폰만 들고나간다. 이것은 나의 미니멀리즘이다. 에센셜리스트로서 가방을 가지고 나갈 때는 앞의 소지품들과 함께 충전기와 립밤을 더 챙긴다. 문제는 이후의 품목들에 있다. 작은 메모장과 필통, 그리고 한 권의 책. 이것들은 쓸모 있기는 하나, 필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메모장과 필통은 만약을 위한 소품이고, 책은 읽기 위해 가지고 다니나 생각보다 읽히지 않고 짐만 될 때가 많다는 점이 고민이다.
출퇴근 길 버스나 지하철에서 읽어야지 다짐하고 가방에 넣어 두지만, 버스에 자리가 없다거나, 피곤하다거나 등의 여러 가지 핑계로 책을 꺼내지 않는 날이 다반사다. 결국 가방의 무게만 늘려 짐이 된 책을 생각하면 사서 고생하는 이런 바보가 또 없다. 그렇다고 책이 없을 때는 꼭 독서하고픈 욕망이 생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일 책을 들고 다니는 바보가 된다. 그러니 결국 바보가 되지 않고 에센셜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꺼내야만 하는 것이다.
4. '체호프의 총'은 에센셜리스트를 표현해 주는 적확한 표현 같다. 만약 내 하루도 문학 작품과 같다면 나는 반드시 버스나 지하철에서 책을 한 번은 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짐만 늘려서 헛노동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며칠간 내 가방에는 발사되지 않은 '체호프의 총'이 들어 있었다. 반성하며 오늘은 반드시 그 총을 발사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가방의 무게를 늘려본다. 과연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