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클로이와 나는 친구들에게라면 절대 우리에게 서로 그러는 것처럼 잔인하게 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밀함을 일종의 소유권이나 허가장으로 여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예의는 차리지 않았다. (p.91)
1. 익숙함에 속에 소중한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그렇다. 왜 나는 소중한 존재에 대해 익숙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모질게 굴었을까. 소중한 존재가 절대 떠날 일 없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 존재는 우리에게서 떠날 준비를 한다. 그걸 몰랐다. 물론 안다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이 낫다.
가까운 사람들, 특히 가족이나 연인에게 친절하지 못하지만 주변사람들에게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평가는 내부의 사람들만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 친절함에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은 상대적으로 덜 담겨있다.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그러나 친절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루에 수 없이 마주치는 버스 기사님이나 택배 기사님, 경비 아저씨, 식당 아주머니 등등. 그분들께 친절한 인사 정도면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친절한 인사 정도로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따스함 그 이상의 책임감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해도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렇게 행동한다.
웃을 수 없다는 것은 인간적인 것들의 상대성, 사회나 관계에 내재된 모순, 욕망의 다양성과 충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p.96)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적어도 사랑의 90퍼센트를 이루는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p.97)
2. 유머라는 것은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유머야말로 미덕 중의 미덕이다. 유머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효율도 높여주며 불필요한 다툼도 피하게 만든다. 상대를 설득하는데도 쓰이며 마음을 열어 신뢰를 쌓는데도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유머스러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즐겁다.
사람들을 웃기는 일은 쉽지 않다. 유머러스하다는 말은 공감력이 높다는 증거이고 낙관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유머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상대나 자신을 비하해서 누군가 불쾌하게 만드는 특정 유모 코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즐거워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유머는 의사소통의 고급 기술이다.
연인 사이에도 유머코드가 잘 맞는 게 중요한 듯하다. 일명 티키타카가 잘 맞는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경우가 많은데, 대화가 잘 되려면 유머코드가 맞아야 한다. 사실 한쪽이 일방적으로 웃기기만 한다고 유머가 잘 통한다고 할 수 없다. 받아주는 사람의 리액션도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잘 웃는 사람들 역시 유머 있는 사람이라고 봐도 될듯하다.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의 경향이다. (p.104)
3. 우리가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설명할 때 입체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입체적이라는 것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 발전하고 변화한다는 뜻이다. 그 성격은 실제로 변했을 수도 있고, 그 주인공을 바라보는 우리의 상황과 시점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조각상을 바라볼 때를 생각해 보면 대상은 하나일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위치, 관점, 경향에 따라 형태도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성격도 바라보는 시점, 시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같은 대상도 내가 우울할 때 뒤에서 바라본다면 어두운 단점만 보이게 되고, 행복할 때 앞에서 바라본다면 밝은 장점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밖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다.
사랑 고백의 어려움은 언어에 관한 유사 철학적인 우려를 자아낸다. ... 클로이와 나는 둘 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 각자의 내부에서 상당히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p.109)
4.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너무나 일상적으로 쓰이기 때문에 확정된 기호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언어는 무엇보다 추상적이며 각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다. 특히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는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보다 추상적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종교적이고, 누군가에게 사랑은 희생적인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무 흔하게 쓰이면 특별함을 잃고 의미가 퇴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그만큼 의미심장해서 사용하기 두려울 수도 있다. 무엇이 됐든 사랑의 의미는 이 세상 각 사람의 수만큼 많은 듯하다.
사랑의 모든 언어는 과도한 사용으로 훼손되었다. (p.110)
5. 언어의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과도한 사용이 그 뜻을 훼손하는 경우가 있다. 일례로 최상급 표현을 살펴보면 우리는 '가장', '매우', '정말', '너무', '진짜'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서 '정말 정말' '너무너무'같이 두 번씩 사용하다가 '핵', '킹', '개' 등등 갖은 단어를 새롭게 붙여 사용한다. 그리고 유행처럼 자주 바뀐다. 비속어도 전 세계 공통으로 어딜 가나 최상급 표현으로 쓴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말에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랑의 모든 언어가 과도하게 사용됨으로 의미가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그 원인은 결코 한 사람에게만 과도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에게나 사용하기 때문에 훼손되는 것이다. 과연 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자주 고백하는 것을 과도한 사용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진심 어린 사랑 고백에 과도한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과도하게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진심의 우러남 없이 아무에게나 쉽게 고백할 때, 그럴 때뿐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 (p.121)
6.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직업? 나이? 성격?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물어보는 질문은 사실 '당신은 그/그녀에게 무엇을 보았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 모두 이런 의미가 있음을 모르고 있다. 사람을 설명하는 데는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이 더 쉬운 도구가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무엇을 보았는지 진지하게 대답한다면 오히려 질문한 사람은 지루함을 느낄지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p.120)
7. 평범함 또한 굉장히 추상적인 단어다. 우리는 과연 평범한 사람을 알고 있나. 평범함이라는 개념은 실제의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우리에게 평범함이란 이상적인 개념에 가깝다. 그렇기에 존재하지 않는 평범함을 본질적인 평범함과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본질적인 평범함을 드러내면, 우리는 이상적인 평범함의 가치를 들이대곤 상대를 비난한다. 그리곤 그 이상적인 평범함에 어긋나는 상대를 제단 한다. 그것이 광기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정말로 저 여자일까? ... 오아시스 콤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왕자나 공주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 (p.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