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철학의 밤 산책 – 한그루의 밤 ep.23
안녕하세요, 한 그루의 밤, 라라입니다.
오늘은 이별에 대한 감정, 그중에서도 '쿨함'이라는 이름 아래 애써 눌려온 상실의 정서를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쿨하게 헤어져야 해", "그 사람 말고도 세상엔 많아", "빨리 잊고 너 자신을 돌봐"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말들은 일견 맞는 조언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누군가에게 이별은 단순히 눈물 몇 방울로 씻겨 내려가는 감기가 아니라, 계절마다 찾아와 폐부를 찌르는 통증 같은 만성질환일 수 있습니다. 감기가 약을 먹으면 낫듯, 이별의 고통 또한 시간이 약이라고들 하지만, 만성적인 고통은 체질을 바꾸는 일과 같습니다. 그 과정은 더디고 힘겨우며,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그의 명저 『사랑의 단상』에서 "상심이란 기다리는 사람의 병이다"라고 썼습니다. 우리는 이 문장을 읽을 때, 단순히 떠나간 연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것은 사랑받던 그때의 나, 그 시절의 빛나던 웃음, 온기를 나누던 체온, 다정했던 그 말투, 그리고 함께 일구었던 삶의 다정한 리듬입니다. 이별은 사랑의 끝을 의미하기보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는 지난한 과정과 같습니다. 이 과정은 때때로 몹시 지저분하고, 부끄럽고, 원치 않게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여정이 됩니다. 우리는 이 혼돈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구축해나가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모든 진정한 삶은 만남에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만남은 분명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존재를 확장시키는 소중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나를 허물어뜨리고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내가 아닌 타인을 내 안에 온전히 들이는 행위이며, 이별은 그 타인을 다시금 내보내는 고통의 작업입니다. 그 과정에서 마음 안에는 텅 비고 황량한 방 하나가 생겨납니다. 이 방을 '쿨하게' 닫고 뒤돌아 떠나는 사람도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방에서 계속해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고, 보지 말아야 할 지난 사진들을 다시 꺼내 들며, 상대의 이름을 아직도 마음속 깊이 저장해둡니다. 이러한 행동을 두고 '쿨하지 못하다'고 질책받을 일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떠나지 못한 자아의 솔직한 일부분이며, 오히려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통로이기도 합니다.
제 소설 『러브 알러지』의 주인공 휘현은 다정하고 건강한 연인을 만나면서 오히려 두드러기 같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킵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 자체가 그녀에게 불편하고 낯설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아이러니한 반응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그녀는 늘 상처와 무시에 익숙한 사랑만을 경험해왔기에, 조건 없이 '받아들여지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낯선 사랑 앞에서 우리는 때로 몸이 먼저 강렬하게 반응합니다. 그 반응은 불편하고, 어딘가 이상하며, 심지어는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특정한 감정의 패턴이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익숙한 고통이 낯선 평온보다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아이러니,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종종 다시 아프기로 결정합니다. 그 고통이 역설적으로 사랑처럼 느껴지거나, 익숙한 자기 위안의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별 후에 자신을 억지로 꾸미고 치장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지금 느끼는 굴욕적이고 추한 자아, 통제 불가능한 감정의 밑바닥을 있는 그대로 겪어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사람을 보고 싶다면 한 번쯤은 밤늦게 몰래 SNS를 들여다보고, 다시 연락하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들면 그것 또한 솔직하게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보세요. 중요한 것은 감정을 억누르며 "나는 이제 괜찮아"라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직 아파요. 그리고 아플 자격이 있어요"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입니다. 이러한 솔직함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점입니다.
노르웨이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그의 대작 『나의 투쟁』에서 자신의 이별과 무기력, 그리고 삶의 어두운 단면들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의 글은 아름답지도, 희망차지도 않지만, 그 안에 담긴 깊은 진실성 때문에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마치 끈적한 진흙탕을 온몸으로 헤치고 지나야 비로소 단단한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처럼, 그는 슬픔과 무기력의 늪 속에서 언젠가 다시 떠오르는 법을 그의 존재 자체로 보여줍니다. 그의 고백은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는 묵직한 위로를 건넵니다.
오늘도 이별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다면, 혹은 그 끝자락에서 홀로 울고 있다면,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도 괜찮습니다. 울고,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못 해도 괜찮습니다. 그건 당신이 이상하거나 나약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뜨겁게 사랑했고, 그만큼 깊이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낫지만, 이별이라는 만성질환은 우리의 존재 자체, 즉 체질을 바꾸는 일과 같습니다. 그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그 사이에도 당신은 분명 자라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 이 밤에도 아픔의 그림자 속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당신은 상실을 겪으며 더욱 단단하고 깊은 존재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 그루의 밤, 라라였습니다. 다음 밤에도, 당신의 이야기와 함께 걸어요.
� 매일 밤, 문학과 철학의 한 그루.
라라의 문장이 당신의 밤에 조용히 닿았다면, 그 마음을 전해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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