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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말해주는 것

메를로퐁티와 체화된 사유 – 한 그루의 밤 ep.36

by lala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이유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오래된 냄새에 가슴이 저릿해지는 때.

혹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는데 어느새 익숙한 골목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때.

그럴 때 나는 내 몸이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몸은 단순히 뇌의 명령을 따르는 도구도, 마음의 하인도 아니다.

오히려 몸은 세계와 나 사이의 첫 번째 경계이자 접점이고,

생각보다 더 오래, 더 정확하게 세계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다.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이 감각을 철학의 언어로 펼쳐낸 인물이다.

그에게 몸은 단지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지각 주체였다.

사유란 머리에서만 일어나는 추상적 활동이 아니라, 몸 전체가 세계와 맺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운동이었다.

우리는 흔히 생각을 머릿속 일로 여긴다. 눈은 세계를 보고, 뇌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구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묻는다.

정말 ‘본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한 행위일까?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지 시신경이 자극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고개를 기울이고, 눈을 가늘게 뜨고, 어떤 사물 앞에서 숨을 잠시 멈춘다.

그 순간, 감각은 몸 전체를 타고 흐르고, 세계는 우리 안으로 스며든다.

지각이란, 몸이 세계와 맞닿는 방식이다.

즉, 우리는 ‘몸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의미는 시간 속에 잠복기를 갖는다.”

우리가 어떤 문장을 읽고,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그 의미는 단숨에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엔 그저 색과 모양, 소리와 형태일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안에 감춰진 감정과 기억, 몸의 반응이 서서히 깨어난다.

그건 마치 깊은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던 기억이

어느 날 문득 하나의 몸짓, 하나의 숨결에 의해 깨어나는 것과 비슷하다.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 과자를 한 입 베어 문다.

그 순간, 유년 시절의 기억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그건 생각해서 떠올린 게 아니다.

입안의 촉감, 따뜻한 기운, 혀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시간의 감각이 먼저 반응한 것이다.

몸이 기억했고, 그 기억이 의미를 불러낸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 감각에 누구보다 민감하다.

메를로퐁티는 예술가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불렀다.

그가 특히 사랑했던 화가, 세잔은 사과 하나를 그리기 위해 무수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과의 모양이 아니라, 사과가 자기 앞에 놓여 있을 때 느껴지는 어떤 존재감, 밀도, 감각을 포착하고자 했다.

붓질은 흔들렸고, 색은 겹쳐졌다. 균형이 맞지 않는 선들 속에, 오히려 몸과 세계가 만난 진동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림은 눈이 아닌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국의 시인 백석 역시 그런 예술가였다. 그의 시에는 ‘냉잇국의 향기’, ‘가마솥의 연기’, ‘젖은 솜이불의 촉감’이 등장한다. 이것은 머리로 쓴 문장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꺼낸 장면들이다. 그의 언어는 이론보다 감각에, 논리보다 체험에 가까웠다. 그 말들은 말 이전의 말, 곧 몸의 언어였다.

메를로퐁티는 말한다.

“사유는 몸의 동작 속에 흐른다.”

우리의 생각은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손끝의 떨림, 눈동자의 방향, 걸음의 리듬—그 모든 것이 이미 하나의 해석이고 반응이며 철학이다. 몸은 세계와 이어진다. 세계는 몸을 통해 들어오고, 그 몸은 다시 세계를 가늠한다. 그래서 때로는 머리를 멈추고, 몸이 가리키는 방향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금 내 손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내 발은 무엇을 향해 걷고 있는가. 그 안에, 아직 말로 붙이지 못한 나의 진심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몸은 결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건 세계를 기억하고, 의미를 품고, 가장 먼저 반응하는 나의 첫 번째 철학이다. 내 몸은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질문을 안고, 나는 오늘도 조용히 사유의 숲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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