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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오징어 게임

무자비한 자본주의 사냥꾼들의 오락

   ‘오징어 게임(황동혁 감독, 2021)’이 한국 최초로 전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1위에 올랐다는 기사가 났다. 그 기사에 딸려 실린 작은 사진은 추리닝을 입은 배우 ‘이정재’였다. 최애하는 배우는 바람결에 목소리만 들어도 안다.

 

 - 오징어 게임 봤어?

  아들에게 묻자, 벌써 다 봤다는 것이다. 엄마 취향에 안 맞을 수 있으나, 소설가니까 보라고 하곤 여친 만나러 나갔다.


  처음 1화는 살짝 지루했다. 우리의 주인공 이정재가 너무나 찌질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2화부터는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두뇌를 너무 긴장시켜 나중에는 머리가 띵하니 아파왔다. 잠시 애견과 산책을 다녀와서 다시 봤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짧게 정리하겠다.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미스터리한 서바이벌 게임에 인생 패배자 456명이 참가해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이야기다. 목숨 값은 인당 1억. 한 명씩 죽을 때마다 돼지저금통에 돈이 억씩 쌓여간다. 게임은 총 6가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설탕 뽑기(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 오징어 게임. 모두 어릴 때 친구들과 해거름까지, 어머니가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칠 때까지 골목에서 놀던 놀이다. 그 모든 놀이에서 경쟁자를 물리치고 암행어사가 되는 자가 456억을 가지게 된다. 게임은 강요가 없다. 민주적이고 공평하다. 모든 선택은 참가자들이 결정한다. 누군가 이 게임은 공평하지 않다고 소리치지만, 그 말은 공허하게 허공으로 사라진다. 왜냐하면 모든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므로.


  황동혁 감독의 영화는 ‘남한산성’ 정도만 본 것 같다. 그 영화는 원작자(소설가 김훈)가 있었다. 책을 먼저 보고 영화를 봤는데도, 상당히 인상 깊었던 영화다. 보통은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면 살짝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영화에서 이처럼 잔인하고, 선정적이고, 폭력적이고 생생한 날것의 밑바닥 언어를 묘사하고 표현해낸 영화는 처음 보는 듯하다. 자기 색깔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코로나19로 세상을 떠난 ‘김기덕’ 감독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나 황동혁 감독도 우리를 불편하고 거북하게 만드는 점에선 김기덕과 같은 반이다. 삶의 진실 혹은 삶의 이면(裏面) 혹은 삶의 민낯을 바라보는 일은 언제나 몹시 불편하다. 그러나 가끔 이런 감독들에 의해 우리는 직면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저수지의 개들’을 감독한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리게 했고,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했다.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란 점에서 타란티노가 떠올랐고, 파우스트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 온갖 추악한 짓을 다 하고도, 끝내 순결한 영혼을 가진 메르헨에 의해 구원된다는 결말처럼 이 영화도 선함을 잃지 않은 사람이 승리한다는 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를 떠올리게 했다. 타란티노의 B급 영화는 그 영화를 보며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와 같다. 또한 황감독의 ‘오징어 게임’도 우리에게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정신이 번쩍 들게, 귀싸대기를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기대어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제도는 없는가.


  황감독은 ‘한국적인 게임들을 서바이벌로 담은 작품을 만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며, 이미 2008년에 이 드라마를 구상했다고 한다. 황감독이 어떤 의도로 이 드라마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 이 드라마가 전 세계 넷플릭스에 1위로 등극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서바이벌 게임이란 단순하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이는 게임이다. 455명을 죽여야 456억의 상금을 받는다. 다시 말해 승리자는 패배자의 시체를 딛고 서야 한다. 세상은 돈과 성과 폭력으로 돌아간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본주의는 돈과 성과 폭력으로 돌아간다. 돈을 위해 누구든 죽일 수 있다. 자본의 증식은 욕망의 노예가 되는 지름길이다. 모두 그 자본을 쫓아가다 세상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 ‘인간쓰레기’로 전락한 456명이 스스로 참가한다. 그들이 실종되어도 아무도 찾거나 납치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품지 않을 인간 말종 들이다.  


  동심을 하나씩 하나씩 잃어가면서 그들은 죽음에 다가간다. 인간의 영혼이 악에 물들어 서서히 마비되어 가는 과정이 리얼하게 나온다. 끝까지 동심을 잃지 않은 한 사람만이 승리자가 된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어떤 지옥에서도, 어떤 진흙구덩이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는, 때 묻지 않는 마음이다.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끝까지 손을 내미는 마음,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바깥세상에서는 가진 것도 없으면서 오지랖만 넓어 남을 도우고 남에게 이용만 당하던 주인공은 456억이 들어 있는 카드를 소유하게 된다. 암행어사가 된 것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암행어사는 타인의 실패를 밝고, 무자비하게 자본을 손에 넣는 자가 과거급제(성공)를 할 수 있다는 면도날 같은 은유도 숨어 있다.  


  바닥으로 내려갈 때까지 간 인간 하류들과 서울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들어간 엘리트도 욕망의 노예가 되어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은 어디가 끝일까. 이 영화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을 다 보여준다. 그 추악한 욕망과 살아남기 위해 인간은 얼마나 저급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게임에서 지면 핑크 요원들이 머리에 총을 쏘아 곧바로 죽인다.


  그 지옥 속에서도 휴먼과 우정은 싹튼다. 이렇게 폭력적인 영화를 보면서도 우리를 울게  하는, 오아시스 같은 장면들이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가진 모성도 군데군데 깔아, 눈물을 훔치게도 한다. 그런 순간은 팽팽하게 감독과 두뇌 싸움을 하던 뇌를 잠시 쉬게 할 수 있다. 


  ‘깍두기’라는 말도 나오고 ‘깐부’라는 말도 나온다. 깍두기는 짝이 안 맞을 때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그 깍두기는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놀이에 다시 참가할 수 있게 하는 어릴 적의 규칙용어다. 깐부는 짝끼리는 영원히 한편이므로 서로 배신하지 않고 가진 것을 모두 공유한다는 의미다. 그런 짝이 지금 내 옆에 존재하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여우처럼 영리한 황감독은 폭력적인 영화 어디쯤에 디테일한 인간의 휴먼과 우정과 모성의 스토리를 깔아야 관객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지를 안다. 시종일관 잔인하게 폭력만 난무하다 끝냈다면, 이 영화는 뒷골목의 B급 영화로 끝났을 것이다. 전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1위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동안 같이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탈북녀에게 일부러 게임에 져 준 지영은 죽는다. 지영은 아버지를 죽이고 막 형(刑)을 살고 나온 어린여자다. 아, 인간은 어디까지 선(善)할 수 있는가. 부처님시절 어느 수행자가 죽으면서 자신의 누더기 옷을 부처님께 주는 얘기가 나온다. 지영의 선택은 인간이 마지막엔 자신의 목숨까지 남을 위해 선행을 베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대목에서 가장 많이 울었다. 그 어린여자 아이의 외로움이 너무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6개 놀이 중 구슬치기를 가장 잘 했다. 여자였지만 온 동네 구슬은 다 내꺼 였다. 내게 다 털린 남자애들은 씩씩거리며 집에 감추어 두었던 보배구슬을 가져와 열 개로 환전한 뒤 또 나와 붙었다. 물론 그 보배 구슬들도 다 내가 땄다. 그때는 그 구슬이 전부(everything)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nothing) 것처럼 죽음 앞에서 돌아보면 456억이란 돈 또한 그 옛날의 구슬치기 할 때의 구슬에 불과하지 않을까.  


  돈이 너무 없어 삶이 시시한 사람과 돈이 너무 많아 삶이 시시한 사람들에게 강추한다. 

이 영화는 우리들의 목에 예리한 칼을 들이대며 질문한다. 넌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런데 누가, 왜 이런 잔인한 게임을 주간하는가. 누가, 왜 인간을 장기판 말로 전락시켜 죽음의 잔치를 즐기는가. 암행어사는 시즌2에서 그 비밀을 밝혀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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