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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피터팬 증후군

외로움을 완장처럼 차고 다녔다

  피터팬은 영국 동화 속의 주인공으로 네버랜드(Neverland, 가공의 나라)에서 꿈과 공상 속을 자유롭게 누비는 영원한 소년이다. 네버랜드에서는 어른이 되지 않고 영원히 아이로 남을 수 있다. 증후군이란 병(病)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달리 동일한 환자에게서 나타나기 쉬운 징후인 경우에 ‘무슨무슨 증후군’이라 이름 붙인다. 


  ‘피터팬 증후군은 성인이 되어서도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어른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타인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뜻한다. 피터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들은 흔히 부정과 퇴행을 방어기제로 사용한다. 부정은 힘든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그리고 퇴행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유치한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피터팬 증후군에 빠진 사람은 책임감이 낮으며, 이상은 높지만 이를 실천하는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은 취약하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정의다.


  나는 ‘피터팬 증후군’을 ‘정신연령 장애자’라 부르고 싶다. 그런 사람들은 주위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글쟁이들 중에도 의외로 정신연령이 19살에 멈춰 있는 부류들이 많다. 정신연령이란 육체의 나이에 따라 정신도 나이를 먹고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걸 말한다. 몸만 성인이 되는 게 아니라 정신도 성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육체적 나이만 먹고 정신의 나이는 미성년자에 멈춰 있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육체적 나이는 세월만 가면 저절로 먹는다. 그러나 정신적 나이는 저절로 먹어지는 게 아니다. 자신의 삶을 깊이 생각하고, 정리하면서 살고, 노후엔 어떻게 살 것인가도 생각해 보며,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남의 삶도 깊이 애정 어린 눈길로 돌아봐야 한다. 그러나 정신연령이 미성년자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자신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외면하고 도와주지 않는다고 아이처럼 징징대거나 공격성을 보이기도 한다.


  끝없이 유년시절의 상처를 우려먹고 우려먹는다. 가령 편모슬하에서 자랐다거나, 계모 밑에서 자랐다거나, 아버지가 늘 부재중이었다거나, 생모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거나,  너무 가난했다거나, 부모가 늘 싸움을 했다거나. 어릴 적 불우했던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이 자산이 되어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한 천재인 척 한다. 그래서 33살 쯤 죽으면 우리는 요절한 천재로 칭송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이 이순을 넘기고 칠순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아직도 19살처럼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을 팔고 다니면 꼴불견이다. 어린 아이처럼 세상이 자신의 생각이나 뜻대로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 이외에는 모두 잘못되었다고 여기며 떼를 쓴다. 심지어 어떤 특정인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척 한 후 영혼을 조종하려 든다. 다시 말해 ‘가스라이팅’하려 한다. 인간은 영물이라 누구에게도 조종당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떠나간다. 그러면 배신했다고 미꾸라지에 소금 뿌린 듯 발광을 한다. 두고두고 곱씹는다. 


  그런 부류는 자의식과잉으로 대부분 눈이 안으로만 향해 있어, 오로지 자신의 아픔만 보이고 남의 아픔은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게 세상에서 제일 슬프고 자신의 형제가 죽은 게 세상에서 제일 슬픈 줄 안다. 남은 자식이 죽은 것도 자기보다 아프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의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줄 안다. 이런 부류들은 자신을 반성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삶의 작은 복병만 만나도 아이처럼 시무룩해져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


  아픔과 슬픔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정신이 성장하면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다고 여긴다. 실지로 그럴지도 모른다. 데카당스(Decadence, 퇴폐주의)에 물든 피터팬인 것이다. 데카당스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예술운동이다. 로마 말기의 몰락해 가는 퇴폐적인 문화에 미적 기준을 두려했다. 과민한 자의식과 현실사회에 대한 반감과 퇴폐적이고 병적인 상태에 대해 탐닉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 환경이 나아지거나 정신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려고 하면 불안하다. 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다시 불우한 시절로 되돌리려 한다. 삶을 탕진하거나 파국으로 몰아간다. 옆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 삶을 불행하게 만들거나, 노름을 해서 다시 가난해지거나, 쓰레기 같은 골동품을 마구마구 사서 돈을 허비하거나, 남의 여자나 젊은 여자에게 탐닉하거나, 술을 퍼 마셔서 몸이라도 망가지게 한다. 행복이 오려고 하면 불안하다. 글을 못 쓰게 될까봐. 이건 천재들이 하는 기행이 아니다. 정신병원에 가야 한다. 아니면 정신연령에 맞는 슬픔과 외로움을 승화시킨 글을 써야 하리라.  

  슬픔도 외로움도 재산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슬픔과 외로움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응시할 수 있을까요. 존재의 아름다움은 삶의 외로움과 슬픔을 먹고 깊어집니다.


  외로워서 글을 쓰다 보니 글 쓰는 게 운명이 되어버렸습니다. 한때는 제 삶의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말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제 소설은 기억과 망상과 집착과 후회와 성찰을 재료 삼아, 상상으로 버무리는 퓨전 요리와 같습니다. 상상은 지루한 현실보다 훨씬 재미있지요, 요리를 하는 동안은 외로움을 잊고 비로소 ‘이곳’에 ‘지금’ 존재함을 느낍니다.


  굶주림은 사자를 뛰게 하는 힘이고, 외로움은 작가를 다시 글 쓰게 하는 힘입니다. 어느 날, 글은, 제 삶의 ‘소비’이자 ‘욕망’임을 알았습니다. 그 소비이자 욕망은 온몸으로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아주 느려서, 세심하게 바라보지 않으면 그 흔적이 미미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그 소비와 욕망은 삶의 쓴맛과 짠맛을 톡톡히 맛보게 한 후 조금 허락합니다. 허나 어쩌겠습니까. 쓰는 자의 운명이란 신(神)의 저주이거나 축복이겠지요. 언제나 저주인 것 같아 외롭습니다. 외로우니 또 글을 씁니다. 그러니 외로움은 저의 재산인 거지요. 외로울수록 저는 부자입니다. 머지않아 외롭지도 그립지도 않은 날이 오겠지요. 그때까지 내 속의 외로움에게 건배!

  

  장편소설 ‘아키코(2011년)’, 작가의 말 전문이다. 십여 년 전 글이다. 간신히, 외롭지도 그립지도 않게 되는데 십여 년이 걸렸다. 이 ‘간신히’는 강가의 모래 탑 같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간신히’를 붙잡고 ‘마침내’로 가는 여정이 고단할 것 같다.


  저 때만해도 외로움을 완장처럼 차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구나. 부끄럽다. 그러나 괜찮다. 이제 간신히 외롭지도 그립지도 않게 되었으니, 내 정신연령은 손톱만큼 더 자라 있지 않겠는가.


  ‘신체연령 장애자’도 있다. 늘 자신은 청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 중엔 나이를 속이는 사람도 있고, 남녀 모두 미치게 동안(童顔)에 집착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 또한 피터팬 증후군이다. ‘신체연령 장애자’는 대부분 ‘정신연령 장애자’이므로 십분만 얘기하면 할 얘기가 없다. 눈높이가 너무 낮아 공감 능력이 낮기 때문이다. 


  거대해 보이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어른이 되어 갔을 때 아주 작아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키가, 눈높이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신체연령이든 정신연령이든 자라지 않고 피터팬 증후군에 묶여 있다면 작은 운동장만 보다 이 별을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늙어가는 게 아니라, 그저 변화되어 갈 뿐이다. 세월이 흐르면 정신은 점점 성장하고, 육체는 점점 변화하는 것이다. 푸른 대추가 붉은 대추로 변하듯이, 푸른 잎이 붉은 단풍으로 물들듯이. 푸르면 푸르러서 좋고, 붉으면 붉어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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