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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아직도 글 쓰세요

글은 찻잔 속의 악마와 싸우는 일

   - 아직도 글 쓰세요?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이렇게 물었다. 

  

가끔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묻곤 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쓸쓸하고 외로워진다. 물론 소설가는 언제나 다음 작품을 쓰지 않는 한, 이번 작품이 묘비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번 소설가는 영원한 소설가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조차 소설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해풍에게

  어떤 질문이든 척척 답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늘 부러웠습니다. 마치 미리 해답을 준비해 둔 사람 같거든요.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답을 미리 준비한 듯이 말을 할 수 이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제 영혼은 어린지 늘 어눌하기만 합니다.


  이십대 초반, 전 제가 가지고 있는 잣대에 세계가 맞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적의를 드러냈었지요. 그러나 세계는 누구의 잣대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 자신이 가진 그 잣대만큼 세계를 바라볼 뿐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미욱하게도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이젠 분노를 담은 발톱을 감출 줄도 알게 되었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분노와 적의를 드러내던 시절, 전 어리석게도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맹신했습니다. 그러나 문학은 사회를 절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왜냐하면 문학은 사회에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을 약간 변화시킬 수는 있을는지요. 그 변화란 것도 쓸데없이 번뇌에 휩싸이게 만들고 질문하게 합니다. ‘왜?’라고 질문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고뇌에 빠지게 되고, 이윽고 늙은이의 눈으로 변하여, 세상살이가 시들하게 느껴지는 니힐리스트나 아나키스트로 이끌리게 되지요. 그러므로 결국 문학은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따라서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문학이 수치심을 일깨우고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친다고요? 그러기에 인간은 너무 약아 버렸습니다. 단, 고뇌하는 인간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지게 되겠지요. 그럼 작가란 무엇인가? ‘왜 나는 작가인가?’하고 질문해 봅니다. 작가란 문학으로 이 슬픈 세계를 구원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순례자’일 뿐입니다. 문학이라는 성지에 별(희망)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 말입니다.


  아, 잠들지 않고 살 수 있는 나라는 없을까요. 왜 이렇게 밤은 빨리 찾아올까요. 장롱 속의 이불을 꺼내다, 문득 부드러운 감촉에 뺨을 갖다대고 울었습니다. 끝없이 아득한 길 위에 서서, 버림받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며 ‘이 길로 가면 별을 만날 수 있나요?’ 하고 물어 봅니다. 그러나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나무들은 침묵을 지킵니다. 지나가는 여우에게 ‘여우야 여우야, 이 길로 가면 별을 만날 수 있니?’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여우는 ‘지상에는 별이 없는 줄 모르니?’하고 비웃었습니다. 해풍, 이 길로 가면 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지상의 별 말이예요.


  모든 희망을 버리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희망에 대한 제 그리움의 흔적들을 모아놓게 되었습니다. 피곤합니다. 죽은 듯이 자고 싶어요. 안녕.

  - 소설집 ‘그리운 눈나라’ 작가의 말 전문 


  오래 전 글이다. 아, 아직도 이 글이 내게 유효하게 진행 중이라니. 나는 진보주의자인가, 답보주의자인가. 늘 꿈에 환영처럼 황량한 벌판을 타박타박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보이곤 했다. 한동안 세상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지내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다시 혼자 길 위에 서 있었다. 요즘은 눈덮힌 끝없는 벌판을 홀로 차를 몰고 가는 꿈을 꾼다. 적요(寂寥). 고요할 적, 고요할 요. 고요하고 고요하다는 뜻이다. 적요한 마음이 좋다. 이럴 때 자주 꾸는 꿈이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일 때는 글을 쓸 수가 없다. 눈 폭풍 같은 마음의 회오리를 겪을 때면 미친 듯이 글을 쓰며, 눈 폭풍을 가라앉히려 애쓴다. 눈 폭풍은 사소한 일에 대한 분노일 때가 많다. 과자부스러기같이 사소한 일에 분노하는 나는, 스스로 그 마음을 ‘찻잔 속의 눈 폭풍’이라 칭한다. 마치 찻잔 속에서 악마와 싸우는 듯하다. 그렇게 힘들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고요하다. 기껏 마음을 다스려 놓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러면 삶이 지루해진다. 딜레마다. 그러니 고단하다. 늘 첨예한 감정의 칼날을 벼리고 벼려야 한다. 미풍에 꽃잎이 지다 그 벼려진 칼날에 닿아 난분분해지도록.

 

  누군가 글은, 편지를 써서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던지는 행위라 했다. 바다를 둥둥 떠다니다가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서 읽히게 되는 편지. 멋진 말이고, 엄청 위안이 되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겪어낸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감정을 표현한 글을 누군가 읽고 성찰이든, 감동이든, 위안이든 느낄 수 있다면 내 삶의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글은 대부분 기억을 질료로 삶는다. 기억이란 언제나 과거형이자 현재형이다. 오감을 곧추세우고 깨어있어야만 기억이 많아진다. 기억이 많아야 스토리가 풍부해지고, 스토리가 풍부해져야 삶을 충만하게 살 수 있다. 오감이 죽어 있다면 ‘좀비’와 같다.


  인간이 본능적이고, 감각적이고, 먹고, 자고, 소비하는 욕망만 있다면 짐승과 다르지 않다. 예술만이 인간임을 증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하고, 건축사를 공부했다. 4000명에서 400명으로 나중엔 79명만이 살아남았다. 79명은 굶주림과 추위와 노동으로 짐승의 시간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들은 서로에게 강의를 해주기로 한다. 영하 45도의 혹한 속에서 굶주린 채 노동을 마친 저녁 시간, 그들은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인간이 인간임을 증명하는 일은 인간의 지적활동과 예술이었다.


  예술가는 다른 사람보다 센스가 하나 쯤 더 있는 존재들이다. 제일 먼저 아파하고 가장 나중까지 목도하는 자들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죽어 있던 감성을, 감정을 깨어나게 해서 좀비의 삶이 아닌, 진짜 인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여, 예술가들은 고단하게 살 수밖에 없다. 배가 고파봐야 남의 배고픔을 알고, 가난해 봐야 남의 가난이 보이고, 아파봐야 남의 아픔이 보이고, 외로워봐야 남의 외로움이 보인다. 그걸 겪은 깊이만큼 더 찬란한 통찰을 건져 올릴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위대함은 거기에 있다.


  - 머하러 글 같은 걸 쓰노? 글쟁이는 다 가난하게 사는데...

  어머니는 내가 약사가 되길 원했다. 어머니는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직업은 약사인 줄 알았다.

  - 엄마, 재능이라는 게 수도꼭지처럼 잠그면 잠가지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는 뭔 소린가 멀뚱하게 쳐다보곤 했다.


  재능이란 무엇인가. 그저 한 순간 반짝하다 사라지는 재주는 재능이 아니다. 재능이란 끈기다. 끈질기게 하는 힘이다. 끝까지 가는 게 재능이다.


  나는 왜 아직도 글을 쓰는가? 


  소설가가 꿈이었으니 소설가가 되었다. 다음은, 그 다음은 능선을 타고 걷는 거다. 내 속에 끝도 없이 고이는 이야기들,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세상을 향해. 한 동안 글을 쓰지 못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내 속에 우글거리는 문장들이 물처럼 차올라 빨리 토해내지 않으면 익사할 것 같기 때문이다.     


  ‘글쟁이’란 말을 좋아한다. 시인이든 소설가든 수필가든 모두 글쟁이다. 수선화든 수국이든 장미든 개망초든 모두 꽃이듯이. 문학적 상황 속에 있는 것, 글쟁이의 삶을 살고 있는 것, 늘 드리븐(driven) 되어 있는 이 프로세스(process)가 행복하다.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충분하다. 소설만 ‘스토리’가 있는 게 아니다. 산문도 스토리가 있고, 시도 스토리가 있다. 내 속에 천천히 고이는 스토리가 있는 한, 나는 글을 쓸 것이다.


  - 아직도 글 쓰세요?  

  - 네. 아직도 글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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