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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아이스케키

베이비부머들에게 이 가을 술 한 잔 올린다

  아이스케키(ice cake). 얼음과자라는 뜻이다. 영남지방에서는 일본식 발음인 ‘아이스께끼’라고 했다. 며칠 전 여고동창 둘을 오래간만에 만났다. 한명은 대학도 동창이다. 다른 한 명은 외국에 오래 있다오는 바람에 자주 보진 못했다. 옛날 여고시절 얘기를 하다 ‘아이스케키’라는 말이 나왔다.


  그녀들은 아이스케키 공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장 뒤에 있는 내방에서 그녀 둘을 앉혀놓고 시를 낭송했다고 한다. 난 기억나지 않았다. ‘미나리깡에서’, 라는 시는 기억났다. 여고 시화전에 걸었던 작품이다. 외국에 있다 온 친구는 기억력이 뛰어났다. 


  가을비가 장맛비처럼 오는 10월 3일. 어제는 태어난 지 일주일 되는 여아 이름을 짓고 들어왔고, 오늘은 2시에 작명증을 찾으러 온 여아의 조부모를 만나고 들어왔다. 이름은 명리학으로 사주를 풀어 주역 괘상으로 뽑는다. 여아의 사주는 아주 훌륭한 선생 사주였다. 사주풀이를 한참 듣던 조모가 여아의 엄마 사주 같다고 했다. 


  - 며느리가 고등학교 영어 선생입니다.

  생년월일시가 전혀 다른데도 사주를 풀면, 부모 자식 간은 직업이나 병이 비슷하게 나오곤 한다. 그럴 때마다 명리학이 신통하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일은 늘 엄숙하고, 어쩐지 숙연하고 또한 가슴 떨리게 한다. 한 생명의 이름을 명명한다는 일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일 아니던가. 내가 명명해준 수많은 생명들이 부디 한 세상 잘 살아내길 기원한다. 원고를 탈고한 후 같은 이런 날은 독주를 마시고 싶다. 그러나 조니워커 한잔에 얼음을 가득 넣고 토닉워터와 레몬즙을 넣은 하이볼을 만들었다. 하이볼을 플라스틱 스틱으로 젖다가, 불현듯 며칠 전 여고동창들과 나누었던 ‘아이스케키’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이스케키’라는 말이 사전에 나오나 하고 검색을 해 보다 깜짝 놀랐다.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여자아이의 치마를 들추며 내는 말’. 네이버 어학사전에 나와 있는 말이다. 초등학교 때 수없이 당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아이스케키 공장 집 딸이라서 그렇게 나만 놀렸는 줄 알았다. 1960년대에서 1970년 후반까지 통용되었을 말이 네이버 어학사전에 그대로 올라와 있다니. 지금도 아이들이 그런 놀이를 한단 말인가. 1970년, 해태 브라보콘이 나오면서 아이스케키 공장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공장은 늘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분주히 움직이는 일꾼들과 가게마다 아이스케키를 짐자전거로 배달하는 배달꾼들과 아이스케키를 팔겠다고 모여든 까까머리 초등학교 머슴애들로 북적였다. 그 속에는 간혹 우리 반 아이도 있었다. 나는 부끄러워 공장 뒤에 있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제 고백하지만 나는 우리 집이 아이스케키 공장을 하는 게 부끄러웠다. 왜 부끄러웠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돈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당시만 해도 오원짜리와 십원짜리가 동전이 아니고 지폐였다. 저녁을 먹고 나면 방에서 그 돈을 가지런히 챙겨야 했다. 거짓말 조금 보태 방안 가득 돈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와 나는 돈을 챙겼다. 공부 잘하는 오빠는 늘 어떤 노동에서도 제외되었다. 꾸벅꾸벅 졸며 돈을 챙겼던 기억이 난다. 


  공장장인 친척 아재와 배달꾼들의 싸움은 늘 돈 때문이었다. 서로 셈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 언성을 높였다. 배달꾼 아저씨들은 주로 이북 말씨를 썼다. 대부분 피난민들이었다. 아버지 책상 위에는 돈다발이 책처럼 쌓여 있었다. 사람들은 저렇게 억척같이 돈을 버는데도 왜 가난하며, 왜 아버지는 돈을 저렇게 좋아할까 싶었다. 늘 화가 나 있는 듯한 아버지를 피해 다니느라 우울하고 외로웠다. 또한 어머니는 시골에서 올라온 숙이 언니와 부엌에서 일꾼들의 밥과 새참을 하느라 바빴다. 커다란 솥에 한 솥 가득 국수를 삶곤 했다. 


  나를 팔아 보증금 없이 아이스케키 통을 들고 나가 장사를 하던 까까머리들은 통을 반납하지 않고 금호강변에 버리기도 했다. 공장장인 아재는 그들을 잡으러 다니곤 했다. 간혹 다트처럼 야바위판을 만들어 삽시간에 아이스케키를 다 파는 아이도 있었다.   


  그 시절 일꾼 아저씨들은 가끔 나를 놀리곤 했다.

  - 영희야, 참외를 잘 못 먹어 씨를 먹게 되면 배속에서 참외가 자란데이.

  나는 지금도 참외를 먹지 않는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언제나 이편에 서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 스크린 속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된다. 


  아버지는 오빠가 초등학교를 들어갈 무렵 과수원을 팔고 도시로 나왔다. 나는 다섯 살 때까지 살았던 적산가옥을 기억한다. 대문에서 집까지 가려면 한 시진은 소요될 것처럼 넓은 마당에 우물이 있었고, 우물가에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그 감나무 아래서 감꽃을 주워 먹은 기억도 있다.

  

  

  도시로 나와 아버지는 이것저것 사업을 하는 사이 기술을 익혔고, 초등학교 3학년에 다시 

이사한 곳이 금호강변,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동네이름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새마을’이라고 불렀다. 학교를 가려면 철길 밑을 지나야 했고, 그 철길 옆에는 거지들이 모여 살았다. 그 옛날에는 거지들이 참으로 많았다. 내 또래임에도 그들은 학교를 가지 않았다. 학교를 가는 우리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길거리에는 배가 부른 여인들이 천지였다. 우리 공장 앞에서 호떡을 구워 팔던 아주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동안 늘 배가 불렀다. 아이를 낳아 업고 조금 장사를 하다가, 어느 날 보면 또 임신을 하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저 아주머니는 힘들 텐데, 왜 저렇게 아이를 많이 낳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 모든 아이들이 오늘 날 베이비부머들이다. 불과 사오십 년 전 얘기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 께끼간다, 께끼.

  내 별명은 께끼였다. 여고시절 내가 지나가면 골목길에서 분명 초등학교 동창이었을 머슴애들이 침을 찍찍 뱉으며 말했다. 나는 두려움을 더욱 차가움으로 위장하고 곁도 보지 않고 꼿꼿이 걸어 다녔다. 그 때 쯤은 이미 아이스케키가 사양길이기도 했지만, 삼각형으로 생겨 ‘삼각당’이라고 명명한 공장터가 도시계획으로 헐릴 위기에 있었다. 내가 대학을 들어가면서 아이스케키 공장은 문을 닫았고 아버지는 다른 일을 했다.     


  어린 날, 아버지가 선생님인 아이들을 가장 부러워했다. 아버지가 붓글씨를 잘 쓴다고 말하는 아이 앞에서는 어쩐지 기가 죽었다. 왜 우리 아버지는 학자가 아닐까 싶었다. 나름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온 힘을 다했을 텐데. 해질 녁에 날아오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인간도 황혼이 되어야 철이 나는 모양이다. 산업이 없던 시절 아이스케키 공장을 한 아버지 덕에 정신적인 허영을 만끽할 수 있는 예술 쪽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었으니, 부친에게 감사해야 한다.


  언젠가 가 본 새마을 동네는 완전히 개발되어 아파트촌이 되어 있었다. 그 아파트 아래 큰 도로변에 있던 ‘삼각당 아이스케키’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팔차선 도로에 수많은  차들만 씽씽 달리고 있었다.


  가을비가 장맛비처럼 내리는 10월 3일, 개천절.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국경일. 집으로 돌아오는 회안대로(서울에서 광주시 오포읍으로 가는 도로)에는 쌍으로 꽂아둔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이며 도열해 있었다. 빗속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는 왜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산업화를 이룩한 아버지들과 베이비부머를 생산해낸 어머니들과 그리고 황혼에 이런 나의 동지, 베이비부머들에게 이 가을 술 한 잔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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