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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판도라]스톡홀름 증후군

나는 타인에게 어떤 물을 들일까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 내 친구 A를 생각하면 이 용어가 떠오른다. 이제 친구라고 하기도 뭣하다. 고등학교 때 붙어 다녔지만 대학을 다르게 간 후, 조금 소원해지다가 결혼을 한 후로는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A는 예쁘고, 착하고 연한 배처럼 싹싹하고 상냥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여자대학을 갔고, 나는 종합대학을 갔다. 그녀의 꿈은 의사에게 시집가는 거였다. 선을 70번 쯤 봐서 집이 부자면서 치과의사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결혼식 날 본 그 남자는 깜짝 놀랄 만큼 키가 작았다. 키가 작은 걸 빼면 A가 꿈꾸던 결혼이었다. 물론 나는 어리석게도 첫사랑과 결혼해서 서울로 왔다. 


  가끔 고향을 내려가면 만나곤 했지만,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다 정말 십 여년 만에 만난 A는 깜짝 놀라게 살이 쪄 있었고, 거칠어져 있었다. 말을 함부로 했고, 눈빛도 달라져 있었다. 소문에 그 치과의사의 성격이 독선적이고 언어폭력이 심하다고 했다. 전혀 지성미가 없는, 돈만 아는 무미건조한 남자라고 한다. 영화나 음악이나 그림은 전혀 보지도 듣지도 않는단다. 평생 소설책 한 권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다못해 클래식음악조차 시끄럽다고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인색하기까지 하단다. 돈 써는 일을 가장 싫어하며, 오로지 치과병원과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달리는 일 외엔 친구도 만나지 않고 모임도 없고, 돈벌레처럼 돈만 모은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오래간만에 만난 동창 3명은 그녀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는 은근히 자신의 집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아들 딸 다 외국 가서 살고 두 부부만 사는 집이었다. 65평집은 가구 전시장 같았다. 집으로 초대 했으니, 금방한 밥에 된장찌개나 비빔밥이라도 만들어 줄 줄 알았다. 그녀는 남편 몰래 멀쩡한 집안을 다 뜯어내고 1억3천을 들여 인테리어를 다시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큼직한 대리석으로 만든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부엌이었다. 그녀는 자장면과 탕수육을 시켜주었고, 큼직한 대리석 식탁에 신문지를 깔아주었다. 진열해둔 멋진 영국제 찻잔 말고, 유리컵에 인스턴트커피를 타 주었다. 말도 공격적이고 부정적이고, 남을 비난하는 말투로 변해 있었다.   


  - 원래 돈도 없는 것들이 우아하게 원두커피 뽑아 먹고, 보이차를 마신다고 도자기 찻잔을 사고 난리잖아...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돈도 없으면서 커피 맛 까다롭고, 명품 보이차를 마시고, 중국 서안까지 가서 칠보를 입힌 자사호를 사오고.


  - 아직도 누가 신문이나 책 읽는 사람 있나? 아직도 글 쓰는 사람이 있기는 하네...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그 날 먹은 음식이 체해 온 몸에 발진이 돋아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며칠 약을 먹고 겨우 가라앉았다. 전혀 문화적이지 않은 A에게서 또 다른 문화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 무능한 부동산 정책(2019년)으로 온 나라가 테러를 당한 듯 집값 상승의 공포에 시달릴 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울에 아파트를 5개나 샀다고 했다. 


  - 미친 듯이 오르기 직전에 잡았잖아. 난 재물 운은 있나봐. 하나님인데 기도를 열심히 한 덕이지...

  그녀는 고개를 뒤로 하고 끝까지 웃어 젖혔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아버지는 장로였다.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을 밤새 읽고, 어린왕자를 사랑하고, 갈매기의 꿈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말하던 하얗고 예쁜 여고생이던 A의 모습은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20대 초반 새로 생긴 예쁜 찻집을 찾아다니며, 원두커피 맛을 음미하던 그 로맨틱한  그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와 그것을 아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인식에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되지.  


  데미안에 나오는 이런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공감하던 그녀의 붉은 영혼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종아리의 붉은 반점은 거의 한 달이나 갔다. 종아리의 붉은 반점이 희미해질 때 쯤,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1973년 8월 23일부터 28일까지 6일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인질범들이 4명의 직원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인질은 인질범들과 애착관계를 형성했다. 생존이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가해자가 친절함을 보이면 피해자의 자아는 이를 유일하게 생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하며, 자신을 해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인질들은 인질범들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했다. 심지어 인질범들을 옹호했다. 이 상황을 본 스웨덴의 범죄 심리학자 베예로트(Nils Bejerot)는 이를 ‘스톡홀름 증후군’이라 이름 붙였다. 


  정신과 용어에 '공격자와의 동일시(identification with the aggressor)'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을 공격했던 사람의 행동과 언어를 따라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학교폭력을 당한 아이가 서서히 자신도 다른 아이에게 학교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과 흡사하다. 공격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가해자의 폭력적 행동을 합리화하게 되는 이유는 상대방의 행동을 모방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자기 방어를 위해 자신도 공격자를 흉내 내거나 닮아 간다. 복수하고 도망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똑같이 따라함으로써 친숙해지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들 네 흰빛 시샘하나니

  청강에 기껏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고려 말 절개를 지킨 충신 정몽주의 어머니가 지은 시조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검은 먹을 가까이 하면 검어진다는 한자성어가 생각난다. 나쁜 사람을 가까이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말도 있다. 리마 증후군(Lima syndrome)이다. 가해지가 피해자에게 감화되어 동일시되는 현상을 말한다. 1996년 12월 17일 페루의 리마에 있는 일본 대사관 점거사건에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14명의 반정부군은 400여명의 인질들과 126일 동안 함께 생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반정부군은 인질들을 동정하고 연민하게 된다. 점차 인질들에게 동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페루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반정부군은 모두 사살되었지만, 후에 심리학자들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리마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인질의 수가 인질범 보다 월등히 많아서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의외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감화되어 착하고 순해지는 ‘리마 증후군’ 부부를 보게 되곤 한다.


  가장 가깝게는 부모님이다. 쉽게 설명하면 아버지가 가해자고 어머니가 피해자다. 그러나 60년 넘게 같이 살다 보니, 아버지는 착하고 순종적인 어머니에 감화되어 공격적이고 독선적인 면이 많이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전혀 물들지 않았다. 문득 생각하면 어머니의 자아(ego)가 아버지보다 한 수 위란 생각이 들곤 한다. 가까이 지내는 인내심 많은 선배언니 부부도 성질 고약하고 고집불통이던 의사남편이 요즘 선배언니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착해졌다고 한다. 그 선배언니도 고약한 남편에게 전혀 물들지 않았고, 오히려 착함을 물들였다.  

  인품은 보지 않고 외적 조건만 보고 결혼한 A나 첫사랑에 목숨 걸고 결혼한 나나 어리석기는 매 한가지란 생각이 든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까지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 너뿐인가 하노라


  정몽주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이성계의 역성정변(易姓政變, 비합법적으로 성씨를 바꿔 왕위에 오르는 혁명)에 참여했던 이직(李稷)의 시조다. 나는 타인에게 어떤 물을 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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