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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정영희의 시네리뷰]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어느 시대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조엘 코엔, 에단 코엔 감독의 미국 영화(2007년)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소설(2005년)이 원작이다. 그는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비견되는 미국의 소설가다. 원작의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냄새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맡아진다. 코엔형제의 영화는 언제나 피가 낭자하고, 인간이 가진 측은지심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원작의 주제를 더욱 폭력적으로, 시각적으로 심화시켜 보여주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텍사스의 어느 용접공이 우연히 마약 상들의 총격전 후의 현장을 발견하고, 어부지리로 200만 달러를 가지고 튄다.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였다. 그를 쫒는 사악한 살인마와 그 살인마를 쫒는 늙은 보안관의 이야기이다. 늙은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분)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를 이해할 수 없다.


  은퇴를 앞둔 벨은 ‘옛날에 나이를 먹으면 하느님이 보살펴주시어 점점 더 살기 좋은 나라로 변하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헛된 희망이었음을 안다. 세상은 결코 좋아지지 않는다. 코엔형제 감독의 모든 영화의 메시지는 마치 ‘신(神)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살인마는 자신이 돈을 쫒아 가는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을 ‘그냥’ 다 죽인다. 벨은 은퇴하고 살인마는 유유히 사라진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2017년 대한민국으로 가져오면 ‘지공파를 위한 나라는 없다’가 될 것이다. 지공파는 ‘지하철 공짜파’의 준말이다. 우리나라는 만 65세 이상이 되면 지하철을 공짜로 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들을 ‘노인’이라 칭한다. 그때부터 저소득층에겐 소액이긴 하지만 기초연금도 나오고, 치매노인에겐 간병인도 나온다. 얼마 전 친구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모든 의료비의 5프로만 계산을 했다고 들었다. 아직 닥쳐보지는 않았지만, 좋은 나라인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지공파’가 되기 전의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생)들이 보리흉년 고개를 넘고 있는 셈이다. 현재 만 54세와 62세 사이가 되겠다. 아직 현역에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퇴직을 한 나이다. ‘지공파’가 되면 그나마 괜찮다. 평생 국민연금을 부은 사람은 연금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공파’가 되기 전까지 길게는 10년 짧게는 5년 가까이 백수로 지내야 한다. 무엇인가를 도모하기에는 두려운 나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가 실패하는 걸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도하는가. 


  나도 베이비부머세대에 속한다. 그나마 ‘역학연구원’을 해서 먹고 살고 있다. 어느 봄바람이 자심한 날, 문득 내 또래 ‘글쟁이’들이 모두 살아 있는지 궁금했다. 구효서, 박상우, 심상대, 신경숙, 은희경, 유정룡, 엄창석, 최용운... 한참 아래이긴 하지만 김별아. 그리고 인사동 어느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윤대녕. 그는 어찌나 고독해 보이든지 오롯이 홀로 ‘작가’ 같았다.


  누군가 작가들을 접시 위의 모래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세월이 지나보니 알 것 같다. 심지어 친하게 지낸 작가 중에는 자신이 ‘스타작가’로 이름을 좀 날리자, 어느 시상식장에서 공지영이 나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묻자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내가 무슨 예수도 아니건만. 내가 너무 시시했나? 나를 안다고 하면 자신의 명성에 구정물이라도 튈 것 같았던 모양이다. 그 말을 십년 후에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그녀는 태양열에 밀랍이 녹듯 지금은 불미스러운 일로 추락하여 칩거 중이다.   


  다들 살아 있다면 어떻게 연명하고 살아왔는지도 궁금했다. 가끔 지면으로 책을 내는 사람을 보면, 아, 이 사람 아직 살아있구나, 생각한다. 문단에 이름 석 자를 올린지도 삼십 년이 되었다. 그러나 문우는 한 명도 없다. 일 년에 한두 번 동인을 만나는 게 다다. 한동안 몰려 다녔지만 지금은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다. 그렇다고 그들을 한 번도 잊은 적도 없다. 물론 글을 잊은 적은 더욱 없다. 언제나 ‘문학적 상황’속에서 살아왔다. 


  명리학 공부를 할 때 잠시 한 눈을 판 것 이외엔 한 눈을 판적도 없다. 이 땅에선 ‘글쟁이’로 먹고 살 수 없다. 먹고 사는 사람은 1% 미만이다. 일본처럼 인구가 일억 이상만 되면 전업 작가도 먹고 살만 하다. 내가 통일을 원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인구 일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다. 그렇다고 먹고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보지 않는다. 그 근원적인 이유를 따지자면 교육부터 문제가 있다. 입시제도의 문제이다. 입시제도가 바뀌지 않는 이상 책을 볼 시간이 없다. 청소년기에 책을 보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책과 거리가 멀다.  


  책을 보지 않는다고 인생이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면의 우아함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명품으로 외면을 치장해도 천박함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자신의 삶의 절대적 가치관을 가져야 열등감에서 해방된다. 자신의 삶의 목표와 즐거움의 기준이 있어야한다는 말이다. 그 힘을 길러주는 게 독서다.(좋은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작가로서 할만은 아니다마는.)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다니는 학생들의 설문조사를 본 적이 있다. 가장 잘하고 싶은 게 ‘에세이’를 잘 쓰고 싶은 게 일위였다. 글을 잘 쓰려면 먼저 읽어야 한다. 먹은 게 있어야 나올 거 아닌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인문학적 지식이 있는)이 ‘리더’가 될 수 있다. 인문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란 생명가진 것에 대한 측은지심과 자신을 성찰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독서는 이 모든 걸 길러준다. 


  유독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자기계발서’는 갈증 난 영혼에 스프레이로 뿌려진  물방울이라도 마셔보겠다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의 방증이다. 그러나 그 물방울이 금세 말라 버리는 건 당연하다. 뿌리에서부터 물을 빨아 들여야지만 영혼의 갈증은 해소 되는 것이다, 그런 책 사서 볼 돈과 시간이 있다면 시간의 검증을 거친 고전명작을 읽기를 권한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한 번도 남의 탓을 하거나, 나이 탓을 해 본 적도 없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고, 끊임없이 배우고 있었고, 미약하게나마 남을 도우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었다. 


  어느 순간 ‘초보노인’의 문 앞에 서 있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다. 오히려 한 가지 욕망을 접고 나니 홀가분하니 좋다. 그 전까지는 늘 남몰래 로맨스를 꿈꾸고는 했다는 걸 고백한다. 인간이 가진 3대 욕망은 성욕과 식욕과 ‘어바웃 토킹’이라 생각한다. 그 중 성욕을 접고 나니 만날 수 있는 ‘인간’이 훨씬 넓어진 셈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어바웃 토킹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다 친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는 당연히 토킹이 안되겠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걸 애당초 나는 알고 있었다는 듯, 스스로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다. 또한 노인이란 고독과 친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끔 불평불만이 가득한 친구도 있다. 평생 뼈 빠지게 일했는데, 만 65세가 돼야 쥐꼬리만 한 연금이 나온다고, 젊은 것들보다 사실 세금을 더 많이 낸다고, 젊은 애들이 늙은이를 부양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늙은이들이 내는 재산세가 젊은 것들의 근로소득세보다 많으니 오히려 젊은 것들이 덕을 본다고, 베이비부머 세대는 요새 애들만큼 관심과 혜택을 받지 못했다고 강변한다. 나라에서 공짜로 받은 거라고는 초등학교 의무교육과 미국원조로 얻어먹은 밀가루 빵이 전부라고도 했다. 물론 술집 ‘담론?’이다.


  지난 대선 때 정치인들이 하나같이 ‘포플리즘’을 내세웠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불안했다. 섣불리 선진국을 흉내 내다간 국가부도가 난 ‘그리스’ 꼴이 될까 겁이 났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대한민국의 고성장시대의 단물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는 저성장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유럽처럼 물건을 아끼고 절약하면서 생활해야 한다. 소비가 대세인 시대는 지나갔다. 석복수행(惜福修行), 복을 아끼고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 청년실업이 정부발표 54만 명이고, 실제 실업자 수는 148만 명이란다. 우리 때는 대학만 나오면 취업 걱정은 없었지 않았는가. 떼돈을 벌 기회도 늘려 있었다. 


  내 오피스텔 건물 앞 주차장에는 두 명의 아저씨가 맞교대로 24시간 근무를 한다. 한 분은 키가 크고 한 분은 키가 작다. 키가 작은 분이 내게 상담하러오는 사람들이 차를 주차할 때마다 친절하게 대해, 내가 돈을 좀 주려고 하자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럼 사주라도 봐 드릴까요?”했더니, 아들 사주를 좀 봐달라고 했다. 난 아저씨 사주도 같이 봐 드리겠다며, 두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적어왔다. 


  아들은 올해만 지나면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1946년생인 아저씨의 사주가 참으로 좋았다. 전화로 사주가 너무 좋으시네요, 라고 말했더니 자신은 수학선생이었고, 연금도 340만원이나 받는다고 했다. 관운도 좋으십니다, 했더니 장학사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아저씨’ 라고 호칭하다 ‘선생님’으로 바꿔 불렀다. 80세까지 운이 있으니 그 때까지는 건강하게 일하시겠다고 말해 주었다. 


  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니로도 멋있고, 나영석 PD의 예능프로 ‘윤식당’의 신구도 멋있고, 내 오피스텔 ‘주차요원’ 장학사 출신 선생님도 멋있다. 그들은 스스로 노인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때도 원로원 노인들은 현실을 비관하며 ‘난세이며, 말세’라고 했다. 우리는 22년 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으로 가는 걸 보았다. 그 때 이제는 ‘구시대의 청산’이고 ‘난세’의 끝인 줄 알았다. 그러나 2017년 우리는 또 대통령이 감옥으로 가는 걸 목도했다. 난세는 끝나지 않는 걸까. 말세는 영원히 진행형인가. 세상은 점점 나빠지고 있단 말인가.


  꽃샘추위가 기승부리다가 봄비에 살짝 자리를 비켜 주고난 뒤 하늘이 맑다. 집 앞 목련나무의 수천 꽃잎이 하마 ‘소멸’을 준비하고 있다. 문득 내 또래 ‘글쟁이’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부디 오래오래 건필하길 빈다.


  어느 시대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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